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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ug 25. 2023

2023.6.7 / 조카딸의 의미

크루즈여행 5일차, 마사틀란(Mazatlan)

나를 두고 이모들은 종종 '우리 조카딸'이라는 표현을 하시곤 했다. 아마 딸 같은 조카라는 뜻 같은데, 이상하게도 조카아들이란 표현은 듣지 못했다. 이모들에게 있어 여자조카란 또 하나의 딸과도 같다는 의미를 이번여행을 통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내 여동생의 딸, 내 엄마의 언니라는 촌수관계를 넘어 조카딸과 이모 사이에는 유사모녀지간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이번 정착지는 마사틀란이라는 멕시코 서부 시날로아주에 있는 항구도시였다. 분주히 빠져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로 한껏 멋을 낸 이모와 나는 몇 가지 귀찮은 절차를 마무리하고 시내로 향하는, 사방이 뚫린 차에 탑승했다. 마사틀란의 첫인상은 마치 유럽의 작은 도시를 떠올리게 했는데, 관광객들을 위한 상점이 즐비하게 거리를 메꾸고 있었다. 이모는 어느 약국에 들러 강아지를 위한 약과 나를 위한 마그네틱을 구입하신 뒤에 상점가를 빠져나왔다. 마사틀란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다양한 택시들이 즐비하게 서있었고, 우리는 호객행위를 하는 많은 택시 중에 하나를 골라 잡아 시내로 입성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모와 내가 택시를 타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멕시코란 나라가 워낙에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인 데다가, 생전 처음 보는 택시기사에게 우리를 맡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모는 어린 조카와 함께하는 지금이야말로 익스트림한 모험을 할 수 있는 기회란 생각에 용기가 생기신 듯했고, 나 역시 걸어서 시내를 돌아다닐 자신은 없던 터라 택시를 골라잡은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택시기사님의 라이선스까지 확인한 뒤에야 카트같이 생긴 택시에 올라탈 수 있었다.


기사님은 좁은 카트로 요리조리 우리를 태우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마사틀란의 시내는 언덕이 많았으며 꽤 적막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기사님은 나와 이모에게 몇 가지 관광지에 내려주게 하셨는데 언덕 위에서 넓게 트인 바다는 왜인지 모르게 기시감이 들었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마치 한국의 제주도나 속초를 떠올리게 했고, 생전 가보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그리스의 산토리니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들게 했다. 여러 관광지를 돌다가 나는 충격적인 장면도 목격하였는데, 마약에 취한 듯한 취객이 광장 조형물 안에 들어가 늘어져있는 모습이었다. 기사님에게 묻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하셨는데, 이곳의 치안이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돌다가 기사님은 어느 절벽에서 우리를 내려주셨는데, 그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가보니 한 청년이 절벽에서 다이빙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기사님은 이것이 그의 직업이라고 하셨다. 거칠게 깎인 절벽 사이로 청년은 준비운동을 마친 뒤 다이빙하였고, 사람들은 환호와 함께 그의 안부가 걱정되는지 잠시 숨을 죽이고 그가 물 위로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청년은 무사했고 그렇게 한 명의 묘기는 여러 사람의 기쁨으로 남을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장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뒤로 기사님은 나와 이모를 태우고 마사탈란의 어느 광장에 내려주셨다. 이곳에서 자유시간을 가진 30분 뒤에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하셨고, 나와 이모는 수학여행에서 내린 여고생들처럼 팔짱을 끼고 광장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동그란 광장을 중심으로 골목길이 있었고, 그 안에는 조그만 상점과 음식점이 즐비했다. 우리는 시원한 커피가 몹시 그리웠기에 커피숍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이내 실패하였고, 시원한 린넨 롱원피스가 걸린 옷가게를 발견한 뒤에 그곳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을 둘러보시는 이모의 눈빛은 우리 엄마의 모습과 몹시도 닮아있었다. 단순히 조카와 이모가 해외의 어느 옷가게에 들른 것뿐이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이모에게 엄마를 볼 때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이모는 여러 가지 옷을 골라보시고 또 입어보시면서 좋아하셨고 나는 이모에게 이 옷이 잘 어울리는지 또는 어울리지 않는지에 대한 의견을 드렸다. 마치 엄마와 쇼핑을 떠날 때 고민하는 엄마에게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라고 권했던 때와 같았고, 그 당시에 나는 이모의 조카를 넘어 둘째 딸이 된 것과도 같은 어떤 뭉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조카딸이라는 의미를 어렴풋이라도 깨달았던 것은, 아마도 그 순간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우리 엄마는 큰 이모를 빼다 박았기에, 동그란 얼굴형의 미국이모와 우리 엄마는 자매임에도 그리 닮은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성향 역시 정반대인 터라 엄마는 안정을 추구하시는 반면 젊은 시절의 이모는 모험가였다. 엄마를 닮지 않은 이모는 내게 엄마가 줄 수 없는 영감을 주시는 분이셨고 나 역시 이모의 젊은 날을 닮았으므로 우리는 이모-조카를 넘은 어떤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인간 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우정을 넘어 혈육으로 얽힌 어떤 끈끈함이었다.

많은 고민 끝에 이모가 고르신 옷은 초록색 린넨 롱원피스였고 우리는 이미 약속한 시간을 조금 넘었기에 서둘러 택시에 돌아왔다. 나는 아직도 스타벅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기에, 이모는 기사님께 근처에 스타벅스에 들러달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멕시코 스타벅스에 처음 입성하였다. 스타벅스는 미국이나, 유럽이나, 한국이나, 멕시코나 다 비슷한 모양이었고 왠지 그 익숙한 인테리어가 묘한 안정감을 들게 했다. 마치 이곳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주문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안도감이랄까. 내가 커피라도 산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이곳에서는 삼성페이가 되지 않았기에 결국 이모가 기사님 것까지 포함하여 세 잔을 사주셨다.


마사틀란 스타벅스 내에 비치된 텀블러는 사실 이쁜 것이 별로 없었고, 이모는 어차피 외국에서 사는 텀블러라면 이모댁 근처 스타벅스에 가보는 것이 어떻냐고 하셨다. 생각해 보니 이모집도 미국이었고, 동료가 캘리포니아에서 산 스타벅스 텀블러라며 자랑을 한 것이 떠올라 냉큼 알았다고 답했다. 기사님은 이후에도 아까 돌아본 관광지들을 다시금 볼 수 있게 해 주셨고, 약 2시간가량의 우리 투어는 처음 기사님을 만난 곳에서 마무리지었다. 사실 기사님과 이모와 함께 기념으로 셀카라도 남기고 싶었다만, 그때에는 왜인지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려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기사님은 아마도 내 말에 흔쾌히 응답하며 같이 사진을 찍어주셨을 텐데.

그렇게 이모와 한낮의 투어를 마친 뒤 배 안으로 돌아와 각자의 휴식을 지녔다. 저녁으로 맛있는 음식도 먹었고, 밤에는 첫날에 선객들과 함께 춤을 추었던 총괄매니저가 나와 MC처럼 진행하고 있었다. 사람구경도 꽤 재밌던지라 잠시 나와 이모는 그곳에 머물렀다가 선 내에서 매일 밤 펼쳐지는 뮤지컬 공연을 관람한 뒤 하루를 마쳤다.


평생을 이모와 엄마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 왔지만, 돌이켜보니 우리 엄마도 이모와 같이 어떤 모험적인 부분을 분명 지니고 계셨다. 그리고 이모 역시 젊은 날의 모험은 현재의 즐거움이 아닌, 미래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이모는 나에게 조덕배의 노래를 들려주셨고, 이모가 이 노랫말을 모국어로 와닿아 이해할 수 있는 조카가 옆에 있다는 것에 좋아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10년 전 이모는 그런 나를 보며 어떠한 안정감을 느끼셨을지도 모른다.


이 여행을 기점으로 나는 이모를 조금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성향이 정 반대인 자매 사이에 내가 조카로 있다는 것이 다시금 신기하기도 했고, 같은 여성으로서의 동질감과, 친밀감, 유대감, 그리고 모녀지간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평생 나에게 친밀한 분이면서도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분과도 같았지만, 소녀처럼 옷을 고르시는 모습은 영락없는 또 다른 엄마의 모습이었다. 이모와 내가 그리도 친밀할 수 있던 것은 내가 이모의 과거를 닮았고, 이모가 나의 미래가 되기를 희망해서도 있겠지만 서로의 딸과 엄마에게서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모는 나에게 내가 꿈꾸는 미래와도 같다면, 나는 이모에게 어쩌면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안쓰러움과 과거에 놓고 올 수밖에 없던 고향에 대한 애틋함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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