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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서 유 Aug 14. 2023

2023.6.6 / 멕시코에서의 스트리밍 라이프

크루즈여행 4일차, 푸에르코 바야르타(Puerto Vallarta)

이틀 간에 항해 끝에 드디어 멕시코에 당도했다. 전날 홀로 배 안을 누비다가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나 보다. 아침엔 조식을 먹으며 아름답게 펼쳐진 푸에르코 바야르타의 항구를 보면서 나와 이모는 배 안에서도 충분히 그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모가  시티투어에 보내주실 참이었지만 기침이 멎지 않은 관계로 외부활동을 홀로 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 날도 역시 배에 머무르게 되었다. 남자친구에게 선물할 스타벅스 텀블러를 꼭 사가고 싶은 마음이었던지라 직원에게 홀로 택시를 타고 시외로 나가는 건 어떠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그는 망설이다가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모가 혹시 너의 여동생이라면 보내겠느냐는 말에 직원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No'를 외쳤다. 그런 대답을 듣고도 밖으로 나갈 만큼 나는 모험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LA여행 때에서도 궁금하긴 하였지만 구태여 홀로 대중교통을 타지 않은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여행에 있어 조심성이 많아지고 있었다. 코로나19 이후로 동양인들이 받는 인종차별에 겁을 먹은 것도 있었고, 궁금할지어도 위험을 담보로 여행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를 더 배에 머무르게 된 나와 이모는 이날도 어김없이 수영장으로 향했다. 이모는 오히려 크루즈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남들이 나갈 때 배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빠져나간 배는 전과는 달리 실로 한적하였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던 풀장은 한산하여 맘에 드는 자리에 오래 앉아있을 수 있었다. 이모는 내가 스타벅스 텀블러를 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수영장에서도 직원에게 한번 더 물어보셨고, 직원은 택시를 타고 갈 수는 있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다만 내가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은 이유는 관광객들의 위험성이 높아 택시기사와 군대가 협약을 맺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직원은 그러니 안전할 것이다라는 취지로 해준 이야기였지만 도리어 나와 이모는 '얼마나 위험하면 군대와 협약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어 고개를 절로 가로질렀다.


한적한 배에서 보내는 하루는 또 다른 휴양이었다. 사람들이 많았던 항해기간동안과는 다르게 배 안은 조용했고 그 덕에 날이 흐려지기 전까지 이모와 나는 함께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따사로운 햇살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크루즈 내에서는 음료를 시키면 굳이 반납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 직원들이 알아서 챙겨가는 구조였다. 그런 편리한 서비스를 누리면서 햇살을 즐기다가 나는 온몸이 햇빛으로 달궈져 방으로 들어가길 원했고 이모 역시 스파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하셔야 할 참이었다. 이모가 스파를 가시는 동안 나는 목욕 후 조용한 배 안을 홀로 둘러보았다.

크루즈에 완벽히 적응한 나는 카페에서 바다를 바라보면서 책을 읽기를 희망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와 이모는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내가 이 날 다운로드한 전자책은 김영하의 '오래 준비한 대답'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딱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홍콩 SPA브랜드에서 주문한 원피스 2벌을 가져오지 않은 것, 또 하나는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은 것, 나머지는 종이책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책일지라도 전자책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태블릿 화면으로 보이는 활자가 쉬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기능이 한정되어 있고 눈에 편안하게 맞춰져 있는 E북리더기와는 다르게 나의 태블릿은 햇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어디에 거치를 해야 할지 몰라 의자 팔받침대에 올려둔 채 쪼그려 앉아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노트북을 들고 오지 않은 것도 꽤 후회되었는데 큰 이벤트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배 위 생활을 기억하기에는 당일에 적은 기록만이 생생하게 모든 기억을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노트북을 차마 여행 중에 들고 오지는 못했는데, 여행 이후에야 비상용으로 30만 원짜리 저렴한 노트북을 따로 구입하였다. 미리 저렴한 노트북을 장만하여 여행 중에 편하게 들고 와 하루가 끝난 뒤 글을 썼다면 나의 여행이 조금은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책을 읽는 마는 하다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남자친구와 카카오톡으로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커피를 마시지 않은 방으로 돌아가 이모를 기다렸다. 노트북을 가져왔으면 시간에 조금 편하게 글을 썼을 것이고, 전자책이었다면 책을 완독 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쉬움이 남을 뿐 후회는 없었다. 글이야 돌아가서 적으면 되고 책이야 눈이 조금 피곤한 감수하더라도 태블릿으로 읽으면 그만이었으니까.


한국이었으면 무엇 하나가 계획대로 되지 않고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꽤나 심하게 받는 타입이었는데 모든 것이 여유로운 멕시코행 크루즈에서는 아쉬움은 아쉬움 정도로 묻을 수 있었다. 구태여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더라도 나는 커피를 마시며 이국의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었고, 날 누구보다 사랑해 주시는 이모와 함께였으며 이모 덕분에 분에 넘치는 여행을 누리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를 담은 <오래 준비한 대답>에서는 스트리밍 라이프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김영하 작가는 밴쿠버로 이사하기 전 자신이 미처 다 보지 못한 책, DVD, CD 등을 정리하며 어차피 모든 것을 간직하고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흘러가게 두었다면 어땠을까라며 말했다. 그 흘러가는 삶에 대해 김영하작가는 스트리밍 라이프라고 이름을 붙이며 사유는 끝난다. 나 역시 집안에는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한 핸드폰 케이스들, 침대도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방에 가득한 100권 이상의 책 등이 내방을 촘촘히 채우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실체적인 짐, 그리고 눈에 잡히지 않은 압박감, 스트레스 등을 적어도 멕시코에서는 그저 흘려보낼 수 있었다. 굳이 모험을 떠나지 않더라도 여행이 좋은 것은 일상에서는 버릴 수 없는 것들에 잠시 초연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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