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라트>는 불친절한 영화이다. 철저히 작가주의적 영화이면서, 예술영화를 좋아하지 않거나 혹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초반이 꽤 지루하게 느껴지는 영화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다른 상업영화와 비교한다면 아마 제대로 된 감상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 보고 나면 초반엔 내가 대체 무슨 영화를 본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 영화를 곱씹어 보다 보면 왜 이 영화가 칸 영화제를 휩쓸었는지 자못 이해하게 된다.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중년의 남자인 루이스는 아들 에스테반과 함께 사막 레이브파티를 배회한다. 3차 세계전쟁이 언제 가속화될지 모르는 이 상황 속에서 루이스는 딸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 레이버들 무리에 합류하게 되고, 조그만 밴 하나에 의지한 그는 무작정 그들을 따라가기로 마음먹는다. 영화 <시라트>는 척박하고 광활한 사막에 시종 EDM이 울려 퍼지며 시각적으로는 무력감을, 청각적으로는 도파민을 선사하는 영화이다. 이 무력감과 도파민이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조합은 마치 극 중 루이스와 그가 합류하게 된 레이버들의 은유와도 같다.
갑작스러운 딸의 실종에 절박한 루이스와 그저 쾌락과 유흥만을 위해 전쟁통에서도 레이브파티를 찾는 레이버들의 목적은 몹시 다르다. 다른 목적을 가졌지만 행선지가 같은 이들은 어느새 유대감을 쌓는다. 그러한 과정에서 루이스가 겪는 또 다른 시련은 다소 늘어지게 느껴졌던 극에 변곡점을 만든다. 갑작스러운 등장인물의 죽음들은 덩달아 무력함을 선사하면서도, 이는 곧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점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고야 마는 복합적인 감정을 선사한다. 영화 말미에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은 루이스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붓다의 모습처럼 보인다. 닥친 운명에 좌절하기를 멈추고 어쩔 수 없이 살아내고 마는 그는 시간이 지나 고통도 무뎌진다는 것을 조금 더 빠르게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시라트>는 단순히 재미가 있다, 없다로 나뉘기에는 모호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애당초 작가주의적 작품인 데다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의해 인물들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에 시청각을 입히면 이런 영화가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면서도, 청각을 끊임없이 활용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문학이 미처 다 선사하지 못하는 어떤 감각을 일깨워준다. 중의적인 표현으로 정지버튼을 누를 수 없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광활한 사막과 귀에 때려 박는 EDM으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하는 이 작품은, 쏟아지는 OTT세상 속에서 극장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같기도 하다.
*해당 영화는 <씨네랩>(영화/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 초청 시사회로 관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