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고 쓸쓸하기까지 한 그 가정법
라라랜드를 다시 보고서
라라 랜드를 다시 보았다. 이미 관람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리뷰까지 쓰고 두고두고 O.S.T를 듣던 이 영화를 나는 다시 보았다. 이미 결말을 다 아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가 끝나기 몇 분 전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세바스찬과 미아가 서로 마주 보며 웃는 순간이었다.
영화 라라 랜드는 마지막 엔딩 시퀀스를 위하여 존재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감상을 글로 옮기는 것조차 어렵고 버거운 영화를 실로 오랜만에 만났고, 나는 그래서 바보 같게도 내가 정작 인상 깊게 본 시퀀스에 대하여 하나도 언급하지 못한 채 글을 마쳤다. 문단 어디에도 넣을 수 없을 만큼 독단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이미 결혼한 남편을 대동하고 그들이 함께 구상한 클럽에 마주친 여자와 그런 여자에게 자신이 그동안 품어왔던 '만약에'를 실컷 펼쳐놓는 남자.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그 카페에서 남자가 연주했던 곡은 그로부터 6년 후에 다시 울려 퍼졌다. 문학의 수미상관 구조처럼 곡은 극 전반의 시작과 끝을 알림과 동시에 남이었던 두 사람이 우리가 되고 종국엔 다시 남이 되고 마는 결말을 알린다. 그리고, 그 곡에는 남자 홀로 생각해보았을 온갖 '만약에'들이 있었다. 그 시간에 우리가 함께 있었더라면 혹은 내가 있었더라면, 서로 처한 상황이 우리에게 좀 더 유리하게 작용했더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결말이 이별은 아니었을까로 끝마친 남자의 처연하고 고독하고 이내 쓸쓸하기까지 한 그 상상에, 나는 울었다.
결말을 아는 영화를 다시 보는 이유는 그것의 결말이 비록 다소 쓸쓸하고 가슴 아플지라도 영화가 결말로 치닫는 그 과정 전부에 있을 것이다. 이미 결말이 끝나 버린 영화 앞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미 그 둘이 남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눈으로 목도하고만 그 남자는, 자신이 쌓아왔던 처연한 상상들을 모두 풀어헤치며 곡을 연주했다. 그는 토로하듯 곡을 연주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을까. 그래서 그는, 다시금 하나 둘 셋하고 건반을 쳤던 것일까. '만약에'로 시작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로 끝나고 마는 그 가정법. 그래, 그 가정법에 오늘도 몇몇은 울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