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센트럴 마켓, 라이브러리 바, 그리피스 천문대를 다녀오다
여행의 시작은 <라라랜드>였다. 여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여러 개 있었지만 그중에 지분의 80%를 이 영화가 차지했다. OST만 들어도 영화 속 장면이 오롯이 생각나는 데다 나이를 한두 살 먹고 보면 더 새롭게 보이는.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당당히 대답을 차지할 영화 <라라랜드>. 각종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는데다 촬영지마저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를 이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로맨스로 시작하여 현실로 끝나는 이야기의 흐름이었다. 영화의 장르를 오롯이 로맨스 영화로 치부하기에는 두 주인공의 청춘을 관통하는 성장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데다 로맨스를 배재하기에는 그 들의 서사가 공감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러니까 어느 한 쪽으로도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영화였다. 나는 영화의 리뷰에서 '그때의 우리는 찬란했었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라며 글을 마쳤다.
<라라랜드>와 더불어 나에게 캘리포니아라는 어릴 적부터 나에게는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셋째 이모가 살고 계시는 친근한 곳이자, 살면서 처음 겪어본 해외이면서 동시에 다시 찾아가고픈 익숙한 곳이었다. 몇 달 전부터 계획한 여행도 아니었거니와, 돌연 미국행 티켓을 끊기로 결심 한대에는 영화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모든 우연은 결국, 그 도시가 낯설지 않음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여행을 결심하고 비행기를 타는 그 순간까지, 여러 우여곡절들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촬영지를 내 눈으로 직접 담고 오겠다는 어떠한 의지였다. 홍인혜작가의 에세이의 제목처럼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렬히 지배했다. 대학원을 들어가기 전 큰돈을 털어 떠날 수 있는 기회도, 어쩌면 한동안 보기 힘들 누군가와의 재회도, 이모와의 추억들도.
그렇게 여행을 결심한 뒤 우연히 대한항공 직항을 110만원 언저리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주저 없이 티켓을 결제하였다. 미국 여행 비자를 발급받고 조언을 얻어 괜찮은 에어비앤비를 예약하며, 봄옷과 겨울옷을 적절히 섞어 간신히 지퍼를 채운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이끌고 공항까지 오기 언 2개월. 그 2개월 동안 많은 기대와 설렘들은 현실에 지칠 때마다 나를 불러냈다. 장염에 걸려 누워있을 때조차 곧 꿈에 그리던 LA 한복판에 서있다는 생각에 기운을 차릴 정도였달까.
설날이라 인파가 몰릴 것이라는 우려에 자그마치 5시간이나 공항에 일찍 도착한 나는 괜찮은 식당에 들어가 한 끼를 제대로 시켜 먹은 뒤 곧바로 면세지역으로 들어가 이모께 드릴 홍삼들을 구입 후 탑승구 앞에 앉아 앞으로 다가올 미국 여행을 기대하며 시간을 보냈다. 비행기 안에서는 이 무거운 홍삼들을 어떻게 하면 캐리어에 욱여넣을 수 있을지, 또 오랜만에 쓰는 영어가 어색하지는 않을지 온갖 고민을 다하며 시간을 보냈기에 제대로 잠을 청할 수도 없었고, 한국시간으로는 낮 2시에 출발하여 미국에서 아침 8시에 도착하는 일정인지라 잠이 제대로 잘 리가 만무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린 뒤, 걱정했던 입국 신고를 허무하리만치 쉽게 끝내곤 공항 구석에 쪼그려 캐리어에 홍삼들을 쑤셔 넣은 뒤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셔틀버스를 타고자 공항 밖을 빠져나왔다. 한국에서 몇 번이나 검색했던 FlyAway 버스를 타기 위함이었는데, 배차간격이 다소 맞지 않는 탓에 정류장에 제대로 찾아온 것인지 의구심을 품었지만 무사히 목적지인 Union Station에 도착할 수 있었다. 셔틀버스 안에서는 a-ha의 'Take on Me'가 조용히 들려왔는데 이 노래가 미와와 셉이 재회한 파티장에서 셉이 연주하고 있던 노래였음을 알고 있던 나는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의 메인곡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 곡이자 내가 상상하던 LA의 분위기와 몹시 어울렸던 훌륭한 선곡이었다.
버스는 유니언 역 9번 출구로 오해할법한 곳에서 정차하였는데, 사실 이 출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하철 출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비교하자면 버스 정류장 번호에 더욱 가까울 정도. 버스에서 내려 곧바로 매표소로 가 요금을 정산한 뒤, 매표소에서부터 숙소까지 차를 타고 오자 이제서야 여행을 왔음을 실감하였다. 생각보다 LA 다운타운이 낯설지 않았는데, 시드니에서 1년 동안 체류하며 외국 도시들이 어느 정도 눈에 익은 탓이었다. 되려 이국적으로 느낀 곳은 다운타운에서 정신없이 5일을 보낸 후 이모가 사시는 오렌지 카운티였다.
내가 묵을 에어비앤비는 흔히 스세권이라고 말하는 스타벅스 옆에 위치한 아파트였는데, 그 때문인지 잠을 잘 때에도 끊임없이 울려펴지는 사이렌 소리와 마치 고담시를 연상케하는 다운타운의 분위기 안에서도, 아파트 주변은 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애시당초 나의 계획은 아침부터 도착하여 숙소에 짐을 풀고는, 다운타운 시내에서 둘러볼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둘러본 후에 그리피스 천문대로 넘어가는 것이었지만 시차로는 꼬박 날밤을 샌 격이었던지라 도무지 체력이 버텨나지를 못했다. 결국 모든 일정들을 취소하곤 휴식을 취한 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그랜드 센트럴 마켓을 먼저 들렸다.
그랜드 센트럴 마켓은 <라라랜드>에서 극 중 두 주인공이 데이트하던 장면 중 등장했던 곳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재래시장이다.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네온사인과는 다르게, 내부의 분위기는 다소 한국의 재래시장과도 같았는데 마켓 내에서는 대부분 음식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아쉽게도 처음 그랜드 센트럴 마켓을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늦은 시각이었던지라 꽤 많은 음식점들이 문을 닫았는데, 운 좋게도 아직 영업 중인 곳에서 괜찮은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미국의 모든 음식들이 그러하듯 주문한 케밥은 반을 잘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이 꽤 상당하였는데, 한입에 다 들어갈 수 없는 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드니에서 먹던 케밥만큼이나 맛이 좋았다. 다른 음식점에서 주문한 까르보나라는 한국에서 먹었던 맛보다 더 짜면서도 꾸덕꾸덕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아도 미국에서 먹은 음식들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다.
그렇게 마켓에서 괜찮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 한국에서 우연히 구글 지도로 발견한 'Library Bar'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다운타운의 밤거리는 여행자의 눈에서 때로는 위협적이었지만, 종종 불 꺼진 한국의 거리처럼 묘하게 익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렇게 10분가량을 걸어서 보게 된 라이브러리 바는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말소리가 쉽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이는 인기 많은 곳이었다. 바 안으로 들어가 보니 손님들 중 대부분은 이곳의 단골들로 보일 만큼 바의 분위기는 다소 활달하였고, 구글에서 보았던 사진으로는 혼자 온 손님들이 바의 이름과 걸맞게 책과 맥주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 상상하였지만 실제로는 직장동료들을 데리고 오기에도 좋은, 분위기 있는 펍의 느낌이었다.
도서관으로 이름 지은 만큼 바 내부의 장식들은 책으로 가득하였고, 다소 어두운 조명과 그곳의 사람들이 내뿜는 즐거운 분위기는 비록 이곳이 내가 상상한 만큼 조용한 곳이 아니었음에도 여행객으로서 충분히 만족할만한 그런 장소였다. 나처럼 바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여행자임을 몸소 티 내는 손님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이곳이 특별하게 느껴졌달까. 로컬들만 아는 숨은 장소를 내가 우연히도 발견했다는 기쁨과, 낯선 이 도시에서 오늘 떨어진 여행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이곳에서 맥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도시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그 묘한 기분에 시끄럽고도 번잡했던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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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 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뒤이어 도착한 곳은 그토록 꿈에 그리던 그리피스 천문대였다. <라라랜드>를 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 영화에 감흥이 없던 사람 일지어도 사랑해마지않을 그 장소. 극 중 미아와 셉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장소이자, 두 주인공이 첫 키스를 하던 바로 그 장소. 영화의 결말에 등장한 셉의 서글픈 상상에도 등장하던 이 장소를 드디어 내 눈으로 담게 된 것이다. 그리피스 천문대에 도착하여 내부로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눈으로 보이는 모든 전경은 차마 사진에 다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영롱하게 빛났다. 야경으로 유명한 곳들 중 실제로 방문한 곳은 그리피스 천문대 한 곳이었지만, 다른 곳의 야경을 아쉬워하지 않을 만큼 이곳은 도착한 순간부터 내 마음을 온통 설레게 했다.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상상 속 어느 한 장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처럼.
천문대 내부는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마치 박물관을 방문한 것처럼 꽤나 다양한 전시물들이 있었다. 각각의 행성에서 내 몸무게는 어느 정도일지 맞추어보는 저울과 그리피스 천문대의 역사, 그리고 우주에서 보는 지구의 모습 등. 비록 많은 인파에 영화 속에서 보았던 고요한 그 천문대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없었지만 영어를 모두 해석할 정도의 능력이 되었다면 한번 즈음은 다 훑고 지나갈 정도로 교육적이었고 크기도 꽤 넓어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에도 좋을 법한 장소였다. 어느 정도 천문대 안에서 시간을 보낸 뒤, 더 늦지 않도록 밖으로 나와 야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걸어나가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극 중 미아와 셉은 리알토극장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그리피스 천문대로 향한다. 불 꺼진 천문대 안으로 곧장 들어와 잠시나마 밖을 둘러본 뒤 두 사람은 인적 없는 고요한 천문대 안에서 둘만의 데이트를 즐긴다. 영화 속 그리피스 천문대 외부가 등장한 장면은 고작 1-2분 남짓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의 야경을 꿈꾸었던 이유는 바로 영화의 스틸컷 한 장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동안 그 여운이 잊혀지지 않아 나의 SNS 프로필을 장식했던 그 사진. 영화를 두세 번이나 관람하고 썼던 글에서 언제나 표지로 당당히 올라왔던 그 사진. 영화 속 촬영지를 찾아가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내가, 보기만 해도 그 장소로 데려가 주는 것만 같은 그 스틸컷 한 장에 나는 여행 전부터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바라보는 야경을 몇 번이고 상상했던 것이다.
실제로 영화 속 장면만큼이나 천문대에서 바라본 야경은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어떤 미사여구의 수식어를 붙여 표현하기 힘든 정도로. 그토록 아름다운 야경에 감탄을 마지않던 사람들의 환호와, 영화 속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관광지에서의 북적거림. 그 모든 분위기가 천문대에서 바라보는 전경을 더욱 아름답게 하였고, 사진으로는 채 담아지지 않을 매 순간들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천문대는 영화 속에서 잠시 등장한 것과는 다르게, 야경을 다양한 곳에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바깥 공간이 넓고 길게 조성되어 있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그 안에서 최대한 발걸음이 닿을 수 있는 곳들은 모조리 걸어본 나는, 이내 핸드폰으로 그토록 내가 좋아하던 영화 속 한 장면을 담게 되자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할 묘한 감정들이 일렁였다. 갑작스럽게 LA로 오게 된 계기와, 두어 번의 고비 끝에 기어코 당도한 이곳이 마치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곳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은 순간들이 더러 존재한다. 그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 퇴색될 법한 다른 기억들과는 달리 뇌 속에서 회자되면 회자될수록 더욱 또렷이 남는다. 당시에 느꼈던 황홀한 순간들은 기어코 쉽게 잊을 수 없는 삶의 일부분으로 박제된다. 그 박제된 기억은 당시 느꼈던 황홀한 순간들을 오롯이 기억이라도 하듯 생각만 해도 괜스레 가슴이 벅차오르며, 다시 돌아가고픈 그리움으로 남는다. 그 그리운 순간들은 삶이 힘들 때마다 찾게 되는 어떤 영양제와도 같아 일상이 권태로울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는다. 더불어 그 순간의 일부를 함께 공유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 추억은 쉽게 휘발되지 않은 기억으로 서로에게 자리 남을 것이다. 추억은 비록 힘이 없을지언정 그 추억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누군가가 세상에 나 말고도 더 존재한다는 사실은 종종 위로를 건넨다. 비록 서로가 기억하는 추억에 대하여 공유할 수 없을지라도, 삶에 이토록 행복했던 순간들도 버젓이 존재한다고.
꿈에 그리던 천문대를 여행 첫날에 경험한 나는, 그날 이후로 다양한 장소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기억은 한국으로 돌아와 가장 그리운 순간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히 떠오르는 그날의 아름다운 전경과, 여행의 설렘은 앞으로 살면서 꼽아볼 몇 안 되는 소중한 추억일 것이다. 4년 전 비엔나 시청에서 본 야경이 내 인생에서 줄곧 재생되는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았다면, 그 영화의 다음 장면에서는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바라본 LA의 야경이 재생될 것이다. 다음 작품을 굳이 기대하지 않아도 될 훌륭한 단편영화처럼.
* 글의 제목은 홍인혜(루나파크)작가님의 에세이집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를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