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1.25] 웨이터의 미소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 투어, 스모크 하우스 레스토랑을 다녀오다

by 사서 유

시드니에서 돌아와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직업을 대하는 두 나라의 온도차였다. 웨이트리스 직종이 하나의 전문 직업으로 인정받는 데다가, 나이와 어울리는 직업 따윈 구분해놓지 않는 호주의 문화. 마트에서는 젊은 층과 중장년층의 직원들이 골고루 섞여있고 한국에서는 처우와 대우가 다소 야박하다고 느껴지는 바리스타 역시 그 나라에서는 기술직군으로 속했다. 애초에 커피 소비량과 바리스타의 처우가 반비례인 이 나라의 현상이 퍽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한국에서는 채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시드니에 사는 1년간 꽤 많이도 실감하며 살아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국에서의 나의 직업과도 맞물려 있었다.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누이 강조하지만, 그 이면에 놓인 전문가(사서)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사회. 나의 직업을 두고 '일이 쉽잖아' '대출반납만 해주면 되는 거 아니야?' 따위의 말들이 쉽게 오가는 사회. 그러나 한국에서의 삶이 차츰 안정될수록 앞서 골몰했던 부분들은 어느덧 무뎌져 이제는 한때 내가 품었던 생각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불현듯 다시 맞닥뜨리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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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날의 피곤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숙소에서 나와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자리를 잡았다. 라떼를 시켜놓고 오늘 일정에 대해 생각하며 유유히 걷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그 시간이 주는 평온함에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맞은편 건물에 그려진 체 게바라를 닮은 여자는 복잡한 이 도시에 몹시도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잠시 후 미국에선 우버와 함께 쓰이는 리프트를 불러, 기다리던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로 향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기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퍽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2년 만에 처음 밟아본 영어권 국가였으므로 나는 여행 전부터 회화에 몹시 신경이 곤두서있었는데, 30분가량의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며 입이 풀려 되려 자신감을 얻은 채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가방검사를 마친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평일 오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관광객들이 앞서 줄지어있었다. 우선 알파벳이 적힌 종이를 받아든 후 조그만 극장에 앉아 스튜디오에 관한 짧은 영상을 시청 후, 알파벳에 따라 나누어진 조 별로 투어 차량에 탑승하여 움직였다. 나는 30대로 보이는 커플들과, 한 가족 단위로 온 이들과 함께 움직였는데 다행히도 함께 탑승한 사람들은 퍽 친절하고 다정하였다. 안전벨트가 쉽게 채워지지 않아 낑낑대자 옆에서 잡아주는가 하면, 어디에서 왔냐며 뒤를 돌아보면서까지 말을 걸었다. 사실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친절과 관심들은 오히려 여행의 시작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투어 중 <라라랜드>에서 미아가 일했던 카페세트를 실제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순간은 10초도 안되게 빠르게 지나가버린데다가 영화가 극장에서 막을 내린지 꽤나 되었던 탓에 세트는 팬이 아니고서야 크게 감흥이 없을 정도로 허전해 보였다. 물론, <라라랜드>를 다시 감상하면 내가 보았던 세트가 등장할 때 아는 체를 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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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촬영지 & 사운드 스테이지(Backlots & soundst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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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_101759.jpg 디씨 유니버스: 더 익스히비트(DC Universe: The Exhi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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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_105521.jpg 소품 전시실(The prop department)

스튜디오 투어를 약 3가지 파트로 정리해본다면 야외세트, 소품실, 그리고 제작 과정 볼 수 있는 전시회 형식으로 나뉘어볼 수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미아가 일했던 카페를 지나쳐 투어차량은 야외 시설을 꽤나 많이 돌았는데 영어를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유추해야만 알 수 있던 야외세트보다도 소품 전시실에 꽤나 흥미를 느꼈다. 게다가 야외세트장에서는 보조배터리를 갖고 왔지만 그 보조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충전기를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급한 마음에 투어시간 동안 근처에서 팔 만한 곳들을 검색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세븐일레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제서야 투어에 다시 집중할 수가 있게 되었다. 소품 전시실에서는 최근 극찬을 마지않던 <조커>에 등장한 네온사인을 발견하자 퍽 반가운 마음마저 들어 좁은 카메라 화면에 최대한 담아보자 애를 써댔다.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곳은 배트맨이 실제로 타고 다니던 배트 모빌의 전시장이었는데, 특별한 시간에만 관람할 수 있다는 이곳은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휘둥그레질 정도로 그 위용들이 꽤나 대단하였다. 무엇보다 실제 사람 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배트맨 동상은 촬영소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만으로 어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평소 마블팬이었던 나는 배트맨 시리즈는 놀란 감독의 시리즈를 챙겨본 것 외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이 날만큼은 몇 번이고 돌아다니며 배트 모빌들을 하나하나 구경하기에 이르렀다. 배트모빌들 이후에는 대본작업과 사무실을 재현한 세트장을 볼 수 있었고 유명 미드인 <빅뱅이론>과 <프렌즈>의 세트장도 함께 구경할 수 있었다. 앞서 구경했던 소품실에 이어, 전시된 유명영화에 등장한 의상들을 다시 구경할 수 있었고 기념품샵 옆에는 <프렌즈>에 등장하는 센트럴파크 카페에서 간단한 한 끼를 때울 수도 있었다. (글을 쓰는 지금 시점에서야 나는 프렌즈에 뒤늦게 빠져있었고, 시간을 되돌려 여행 전에 프렌즈를 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꽤나 큰 후회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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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모빌(Batmob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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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_111650.jpg Stage 48 : Screen to 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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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_111926.jpg 프렌즈 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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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_112127.jpg 빅뱅이론 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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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ner Bros. Studio Tour Hollywood

즐거운 투어를 끝마치고 나는 멍청하게도 기념품샵에서 스튜디오를 빠져나가는 방법에 대해 검색했는데, 원인은 나의 비루한 영어실력이었다. 영어 듣기 실력이 중급 이상이라고 자부하던 나는, 최대한 가이드의 말을 해석하고자 노력하였는데 그만 스튜디오가 끝나고 다시 같은 차량을 타고 돌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것이다. 동행이 있거나 좀 더 차분히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즉각 내가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스태프에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테지만 나는 투어 후기에 대해서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나 같은 멍청이들을 위하여 기념품샵의 입구는 철저히 통제되어 있고 출구 역시 계산대 옆에 있었던 데가 사람들이 스튜디오 내부를 돌아다니지 않도록 스태프들이 감독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 여행할 때에는 눈에 빤히 보이는 해결방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존재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엉뚱하리만큼 우스운 에피소드이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심장이 쫄리며, 스스로 얼마나 멍청이 같던지.


그 와중에 기념품샵에서 무엇이라도 사야겠다 마음먹은 나는 중간 사이즈의 엽서를 골라 계산하곤, 투어 차량을 타고 스튜디오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이크로 5핀 충전기가 필요했던 나는 스튜디오에서 도보로 약 10분 정도 떨어진 세븐일레븐에 가기 위해 고가도로 위를 건너게 되었는데 이른 낮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은 탓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누군가 차에서 내려 나를 채가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적막함. 심지어 편의점은 주유소 안에 있는 규모가 작은 곳이었는데 흔히 보던 공포영화 속 한 장면이 생각나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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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사히 충전기를 손에 넣은 뒤, 스모크하우스로 발길을 옮겼다. 중간중간 이쁜 식당들과 건물들에 멈추어 서서 사진도 찍고, 사람들도 구경해가며 걸으며 얻을 수 있는 행복들을 하나하나 느끼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스모크 하우스는 영화 <라라랜드>에서 극중 미와와 세바스찬이 처음 만나는 장소로 영화 개봉 이전에도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며 유명세를 날렸다. 1946년 세계 2차대전 말에 개업한 이 식당은 오랜 세월 많은 명사들이 방문함과 동시에 라라랜드 외에도 다양한 영화의 촬영지로 쓰였다. 참고로 국내에서는 <나 혼자 산다> 다니엘해니편에서 그가 패널들을 데리고 라라랜드의 촬영지라며 소개한 적도 있었다.


식당 앞에서 출입문을 찾아 다소 헤맸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그야말로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늦봄처럼 후덥지근하던 한낮의 햇살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식당 내부는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온 것을 절로 실감하게 하였다. 정숙한 식당의 분위기에 연신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카운터에서 혼자 왔음을 알리고, 자리를 안내받았다. 식당엔 모임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고 나처럼 혼자 온 손님은 없었던지라 자리에 앉는 그 순간까지도 뻘쭘함을 쉽게 감출 수 없었다. 이윽고 메뉴판을 안내받고 운 좋게도 20불짜리 코스요리가 있는 것을 보고는, 큰 고민 없이 코스요리를 주문 후 그저 눈의 휘둥그레져 사방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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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보니 오래된 식당에서 느껴지는 인테리어와 독보적인 분위기는 다른 곳과는 쉽게 대체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이곳이 굳이 <라라랜드>가 아니어도 충분히 관광지로서 가치 있는 곳임을 실감했달까. 코스요리를 처음 먹어보는 나로서는 다음 음식을 혼자 기다리는 그 시간이 제법 길게만 느껴졌는데, 그동안 제법 여러 생각이 들었다. 20대 중반에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가난하게 떠났던 24살의 유럽 배낭여행과 5년이 흘러 안정적인 직장을 얻은 후 떠난 미국여행의 갭이 피부로 와닿은 것이다. 24살이었다면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을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운 좋게 코스요리를 혼자서 즐기고 있는 여유로움이라니. 가게에서 울리는 잔잔한 음악과 나보다도 더욱 여유로워 보인 사람들의 분위기는 지금 이 순간을 더욱더 낭만적으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비록 운 좋게 special price로 먹어본 코스요리였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나도 어른의 대열에 합류한 기분이었달까.


더군다나 혼자 식사를 하다 보니, 나이가 제법 지긋한 웨이터분들에게 자연스레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대개 미국의 음식들은 그 양이 한국의 2배 이상이었던 터라 나는 요리에 제대로 손을 댈 수 없었는데, 이만 후식을 부탁드리자 To go하는건 어떻겠냐며 다 남겨도 괜찮겠냐고 묻던 웨이터분의 서비스는 마치 한국에서 흔히 보던 어른들의 제스처와도 비슷하였다. 무엇보다 얼굴에 다 드러날 정도 본인의 직업을 꽤나 재밌어해 보이셨는데, 그 웨이트분들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돌연 한 가지 생각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웨이트리스를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을까, 혹은 나이 먹은 웨이트리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할까.'


물론 팁문화가 발달되어 있는 나라의 친절도는 그렇지 않은 나라에 비해서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계기는 친절도의 문제라기보단 '나이 든 웨이터'가 눈앞에 있으면서도 생소하게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시드니에서 느꼈던 어떤 충격(나이에 따른 직업이 크게 구분되지 않은 것)을 다시 경험한 기분이었다. 문득, 탑골GD로 몇십 년 만에 유명세를 얻은 양준일님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서빙을 하며 살고 계시다는 그분의 인터뷰에, 여론의 반응은 '여태 서빙을 하며 살았대'라며 '서빙=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힘든 일'처럼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분의 살림살이가 설사 여유롭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은 그런 반응들 역시 직업에 대한 인식에서 생기는 말들이리라. 마치 서비스직군을 대하는 우리나라의 직업인식이 여실히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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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_141405.jpg Smoke House Restaurant

물론 오랜 세월 구축되어온 제도적 장치가 전혀 다른 나라의 인식 차이가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도 이렇게 된다면 어떨까'하고 그려보는 막연한 상상 같은 것이다. 실제 가게 내부는 <라라랜드>와는 달리 그랜드피아노는 없었지만, 가게 여러 곳을 구경해보며 느낀 것은 영화가 이 식당의 분위기를 꽤나 잘 잡아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와인색이 떠오르는 이미지와 노란색의 조명들, 그리고 고전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등장할법한 소품들.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의 촬영지라는 이유로 들러본 식당에서 생각할 거리를 건네받고는 시간이 넉넉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한낮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