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여성작가의 책 | 야망계급론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돈을 쓰고, 어떻게 행동하며, 무엇을 높이 평가할지 등에 관한 야망계급의 미묘하고 점점 더 비과시적으로 달라지는 선택이 자신과 자녀들의 사회적·문화적(그리고 종종 경제적인) 특권을 강화하면서 나머지 모두를 배제한다는 사실이다. 야망계급 성원들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확신과 자신들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가 정당하다는 인식에 기반해 사회 전체에서 점증하는 불평등을 무시할 수 있다. 최소한 이들은 자신들이 비난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미국의 새로운 유형의 과시적 여가는 뚜렷한 부작용을 초래한다-과시적 여가는 그 어떤 디자이너 핸드백보다 더욱 심한 사회적 계층화와 불평등을 야기한다. 적어도 명품 핸드백은 경제적 여유에 따른 선택이라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과시적 여가는 도덕적 선택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하는지에 관한 사회경제적 한계(야망계급의 부유한 성원들이라면 사회경제적 자유)를 무시한다.
물론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남들과 다르기를 원하는 동시에 어울리고 싶어 한다. 소비는 이런 구별과 정체성을 창조하는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거나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에는 구조적인 결함이 있다. 이 욕망을 채우려면 언제나 타자를 배제해야 한다. ‘우리’의 창조는 불가피하게 ‘타자’를 창조한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명품 로고가 있는 옷과 가방으로 치장했다. 다른 한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 더 부자일까? 현실이라면 이런 걸 따지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 있으나 가상의 선택이니 한 번 골라보도록 하자. 대부분은 명품으로 ‘두른’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요즘 부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21세기 상류층의 소비는 보다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망계급론”은 ‘소비는 정보와 정체성을 전달하는 하나의 과정이자 포지셔닝’임을 지적한다. 먼저 저자는 최근 부상한 야망계급이 무엇인지 밝힌다. 야망계급이란 지배적인 엘리트 문화집단이다. 이들은 특정한 가치관과 지식 습득에 기반한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고, 지식을 얻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사회적, 문화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야망계급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상층 계급은 아니지만, 기꺼이 여가를 지식과 생산성으로 가득 채우며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야망한다.
말로만 들어보면 그다지 나쁠 것 같지 않은 야망계급이 왜 문제의식까지 가지고 바라봐야 하는 존재인 것일까.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소비 양상을 분석한다. 과시적 소비가 주였던 과거와 다르게 21세기는 야망계급의 비과시적 소비가 부상했다. 비과시적 소비에는 정보비용이 드는 소비나 대단히 값비싼 비과시적 소비가 있다. 예를 들면 “뉴욕타임즈” 칼럼에 나온 글을 인용하며 집단에 어울리는 것이다. “뉴욕타임즈” 구독 금액은 그렇게 비싸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뉴욕타임즈”의 칼럼을 읽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고 지면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수준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부유층은 점점 비과시적 소비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하고, 가사처럼 노동집약적인 상품에 지출하며 여가를 확보한다. 여가를 통해 경험 중심의 지출을 하고 그것은 그들의 문화 자본이 된다. 그들은 교육이나 연금, 의료처럼 장기적으로 효용이 큰 소비를 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반면 중간 계급은 장기적으로 큰돈이 드는 것들보다 지금 당장 구매할 수 있는 명품을 구매한다.
심지어 모성마저 과시적 유한 실천으로 작용한다. 모유 수유나 애착 육아 같은 양육 방식을 가능케 하는 건 엄마의 시간과 경제적 여유, 높은 교육 수준이다. ‘자발적 소박함’을 추구하며 유기농 식품을 사 먹고 농민과의 직거래를 선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물질적 재화보다 비물질적 가치와 자기표현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비과시적 소비는 사회의 진보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다수에게 비과시적 소비 자체가 선택지에 없음을 간과하며 중간 계급을 배제하고 결국 양극화 현상에 기여한다. 결국, 윤리적 소비를 하고 있다는 위안이며 실질적인 진보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지로써 작용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트위터(현 X)였다. 얼마나 윤리적인 소비를 하는지 앞다투어 말하며 지식욕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은 플랫폼이고 나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한마디로 야망계급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트위터뿐만 아니라 모든 SNS가 그럴지도 모른다. SNS는 누군가에게 보이는 곳이고, 그런 곳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이 특정 명품 브랜드가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이 되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든 그렇지 못하든(못하는 게 더 무서울 것이다) 나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에 취해 정작 소외당하는 계층을 바라보지 않는다. 더 위로, 더 높은 곳으로, 그저 올라만 간다. 그 위의 풍경은 과연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