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의 애니메이션
*본 글은 애니메이션 전문 웹진 <아니나>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anination.net/Content?cd=view&ContentCode=322&CategoryCode=1&SortCode=3)
※ 본 글에는「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와「목소리의 형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목소리의 형태」를 봤을 때를 돌이켜보면, 학과 교양 과목으로 수화를 배운 직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수화를 가르쳤던 강사분은 청인이었고, 그 수업은 수화를 가르치는 동시에 학생들이 청인에 대한 이해 부족을 고치는 데 꽤 큰 노력을 했었다. 수화 자체는 쓸 일이 거의 없어 대부분을 까먹었지만, 그 이후로도 여러 장애인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에 대해 꾸준히 생각해볼 기회를 얻은 것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와중에 청각장애인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내렸던「목소리의 형태」를 보게 됐었다. 당시에는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많이 보는 편이 아니었기에 야마다 나오코 감독 특유의 연출 방식에 익숙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꽤 연출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걸 기억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작품 속 두 주인공인 쇼야와 쇼코를 향한 가해자들의 묘사는 심하게 불편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닌 쇼야의 묘사는 꽤 성실하게 수행했지만,「목소리의 형태」의 각본이 가해자 옹호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애초에 쇼야 쪽이 아닌, 쇼야 쇼코 둘 모두를 고립시킨 카와이, 우에노, 초등학교 선생 등의 가해 캐릭터들이며 이들에 대한 고찰에 영화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해자를 향해 반성이나 권선징악 등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피해와 가해 사실에 대한 자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친구 관계를 봉합시키려고 시도한 것은 가히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폭력에 가까운, 납득하기 어려운 전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꽤 불쾌한 경험이었던「목소리의 형태」는 한동안 기억 속에 묻고 있었으나, 최근 몇몇 계기들을 통해 다시금 기억에서 꺼낼 필요를 느꼈다.
프로 배구계에서 시작되어 사회 전반에 펼쳐지고 있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 지목들은 당연히 여러 애니메이션에서 다뤄진 학교폭력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개인적으론「목소리의 형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21년 1분기에 방영 중인「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와 현 사회의 큰 이슈인 학교 폭력은 둘 다「목소리의 형태」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이하 원에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찾아온 흥미로운 작품이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드라마 작가인 노지마 신지가 일본 드라마 제작 환경의 컴플라이언스에 회의를 느끼고 좀 더 자유로운 창작 환경을 보장받기 위해 애니메이션으로 넘어와 집필한 첫 작품인 만큼,「원에그」는 기존의 애니메이션과는 전개가 이질적이다. 대다수의 제작진은 해당 직책이 처음인 사람들로 구성되고, 제작사의 첫 단독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인 데다가 주인공 성우마저「원에그」가 데뷔작이니, ‘처음’들이 모여 만든 애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인원 구성도 이런데 원작도 없다 보니 방영 전까지 작품에 대한 정보가 전무해서 애니메이션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라프텔은「원에그」를 ‘가슴 따뜻한 일상물’로 홍보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원에그」는 여러 이유로 친구들을 자살로 잃은 4명의 소녀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에그 세계에 뛰어들어 수많은 다양한 이유로 자살을 한 에그 세계의 소녀들을 구하는 판타지 파트와, 4인방의 개인사와 트라우마를 풀어나가는 일상파트의 교차편집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의외로 액션 쪽의 연출이 탄탄하고, 각자의 개인사가 펼쳐지면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연들은 각본가인 노지마 신지의 매력이 여실히 드러나기도 하는 매력적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나「원에그」가 4명의 소녀, 그리고 에그 세계 속 여러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다루는 방식은 꽤 인상적이다. 물론 폭력의 종류에 따라 역량의 한계인지 성찰의 부족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끔 부족한 인식이 드러나긴 해도, 여전히 매력적인 피해와 가해의 서사라 생각한다.
현실 속, 그리고「목소리의 형태」속 폭력의 가해자는 피해자의 소위 ‘비정상성’과 부족한 사회성 등의 여러 빌미를 이유로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사회는 피해자가 어떤 인격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피해 사실을 부풀린 것은 아닌지, 가해자에게도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건 아닌지 등등 수없이 많은 핑계를 들고 사과를 회피한다. 혹은 ‘어린 시절의 철없던’이라는 마법의 수식어를 이용해 지금은 달라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폭력의 형태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를 띨 수도, 혹은 은밀한 뒷공작과 심리적인 부담 등을 유발하는 식의 간접적일 수도 있다. 다양한 학교폭력의 양상은 그만큼 피해자들 또한 피해 사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어렵게 하는 것은 물론,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폭력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예시를 들자면,「목소리의 형태」속 카와이가 우에노의 쇼코 험담에 동조하고, 쇼야의 폭력적인 행태를 말리지도 않았음에도 폭력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꼬리자르기식으로 쇼야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내세운 것을 떠올릴 수 있겠다. 혹은 우에노가 당연히 소통에 불편함이 있을 수밖에 없는 청인인 쇼코의 의사소통 방식을 이유로 들어 자신이 쇼코를 싫어하고 그렇기에 따돌림과 폭력을 행사했다고 변명하는 대사는 현실 속 가해자들의 변명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쇼야가 쇼코를 향해 가졌던 자기만족식의 죄책감에서 시작해 피해자/가해자의 관계 고찰과 반성을 다룬 영화라지만, 그 외의 모든 폭력과 피해/가해 사실을 덮어둔「목소리의 형태」에 사람들이 가졌던 불만족은「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에 이르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원에그」는 여러모로「목소리의 형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애니메이션이다. 무엇보다도「원에그」의 감독 와카바야시 신이「목소리의 형태」의 감독인 야마다 나오코를 존경하는 인물이며, 야마다 나오코와「케이온」을 함께 만든 호리구치 유키코와「22/7」의 프리퀄 영상에서 같이 작업한 경험을 바탕으로 교토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감독이 사회적 문제를 거리낌 없이 다루기로 유명한 노지마 신지와 함께 만든「원에그」는「목소리의 형태」가 다룬 주제를 좀 더 확장하고, 좀 더 섬세하고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이「목소리의 형태」와 (당연하게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두 작품의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와 문제를 가진 채로 이를 극복하고 일상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원에그」와, 가해자 정체성으로 인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의 시점으로 진행된「목소리의 형태」는 다를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원에그」는 여러 피해자의 트라우마와 (사회적인)문제들을 무척이나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본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인상적인 것은 피해자들을 단순히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가둬놓지 않는, 다층적인 존재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주인공 4명의 성격과 트라우마, 가치관, 사회적 배경 등 개개인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요소를 충돌 시켜 그들이 단순한 피해자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원에그」는 우리에게 ‘피해자’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피해자들이 쉽게 가질 법한 여러 형태의 자기방어 기제를 표현하고 이것이 조성해내는 불안정한 언행과 부조화를 이용해 긴장을 연출하는 것에 능수능란한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는「목소리의 형태」에 비해 훨씬 직접적으로 폭력을 묘사하거나 언급하며, 인물들의 심리 또한 꽤 알기 쉽게 대사를 통해 전달된다. 야마다 나오코 특유의 연출 방식은 인물들의 대사나 설명 등을 통해 직관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기보단, 그녀의 상징적인 연출인 꽃말을 이용한 암시나 인물들의 몸짓, 표정, 미장센 등을 이용한 비언어적인 표현들로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이는「원에그」와 차이를 지닌다.
그런데도 두 작품이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은, 와카바야시 신이 야마다 나오코의 스타일을 차용해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동작과 발동작의 클로즈업을 통해 심리를 묘사하는 것은 두 작품의 유사점이겠지만, 와카바야시 신의 경우 이런 연출을 상황의 묘사나 전환에 쓰거나, 혹은 대사와의 동작의 모순된 병치를 통해 복잡한 심리를 표현하는 등의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해당 연출을 활용해낸다. 그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특정 의미로 해석되는 비언어적 표현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내거나 혹은 비언어적 표현과 대사를 같이 사용해 좀 더 풍부하게 감정선을 연출하기도 하는 것 등등 와카바야시 신은 야마다 나오코의 영향을 받았음과 동시에 자신만의 해석을 추가해 더 나아간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원에그」와 와카바야시 신의 연출 방식은 기존에 이미 사회 문제를 수없이 다뤄온 노지마 신지의 각본과 만나 시너지를 낸다.「원에그」는 앞서 말했듯 의도적으로 주인공 4인방의 설정을 충돌시키는 것은 물론, 이들 서사의 시작점인 친구의 자살 또한 이유가 각각 다르며 자살이라는 촉매가 각자의 어떤 개인적인 불만(혹은 문제)들과 엮여 트라우마를 형성했는지 공들여 설명한다. 이러한 서사는 한 명의 피해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폭력 때문일 수도, 혹은 훨씬 더 복잡한 여러 폭력과 문제들의 결합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결정적인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현실 속 여러 학교 폭력 폭로들이 나오면서 종종 보이는 표현들이 “저게 과연 학교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행동인가?”였던 것을 떠올렸을 때,「원에그」가 표현해내는 피해의 다층적인 서사는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중 사회문제와 그로 인한 피해자들을 다루는 씬들과 일상 장면들의 온도차가 크지 않게 연출되고, 오히려 둘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교차편집 되거나 때론 일상이 더 불안정하게 연출되는 것은 피해의 다층적인 서사를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또한「원에그」가 제시하는 트라우마의 극복 또한 트라우마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해소를 통해서도 해결이 안 될 수도 있으며, 때론 수없이 지나가는 호의 중 하나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주장한다. 문제의 해결이 사회가 주입하는 ‘정상성’에 기반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트라우마의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이면 된다는 것은 수많은 학교폭력 및 사회고발 영화들이 추구한 해결 방식과 대조되는 지점이다.「원에그」의 7화에서 리카의 자해가 자기 긍정의 의미로 재해석되고, ‘모성’으론 설명될 수 없는 관계에서 서로를 보호하는 ‘공의존’의 개념을 빌려 또 하나의 가족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은「원에그」가 어떤 관점에서 폭력과 피해, 트라우마를 다루고 이를 회복해 나가려 노력하는지 보여준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으며 완전할 필요도 없기에 각자의 불안한 부분, 긍정적인 부분들을 모두 받아들이려는 모습은 이 작품의 태도를 잘 설명한다.
명확한 악으로 정의된 줄 알았던「원에그」속 악역인 원더킬러들과 이들의 피해자로 설정되어 구해야 하는 존재들로 설명된 에그 속 소녀들도 그 정체성이 주인공 4명이 모두 모인 5화 시점에 이르러 뒤집히기 시작한다. 귀신 혹은 조현병으로 인한 상상물로 표현된 6화의 원더킬러, 자기혐오로 인해 발생한 5화의 원더킬러, 자신만이 아닌 주변인들도 함께 파멸로 몰고 간 7화의 에그 세계 속 소녀들 모두 단순 가해/피해의 시선으로 바라봐선 설명이 불가능하다. 모든 에그 속 소녀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자살의 이유가 다양하며 그 서사를 단순하게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가 보여주는 폭력과 피해/가해 구도의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들은 오히려 단순 반성, 속죄의 차원을 벗어나 트라우마와 상처의 회복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다루기 수월하게 만든다. 가해자를 끌어다가 반성과 사과의 서사를 읊게 할 바에 차라리 피해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 받아들일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욕망하도록 풀어주는「원에그」의 방식은 개인을 존중하는 동시에 피해자성에 점철된 우리 사회가 폭력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튼다. 피해자성에 얽매일 수록 사회가 요구하는 해결방식이 해당 피해 사실과 가해자의 행동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은, 수많은 학폭 폭로자들이 가해자들의 직접적인 사과와 반성보다 그저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가와 연결 지을 수 있다.
몇몇 원더킬러의 서사의 경우 안일한 관점을 보이기도 하고, 특히나 ‘어른’이 되는 것에 진심으로 두려움을 표하는「원에그」는 그런데도 이들이 각 개인이 완전한 존재일 수도 없고, 완전할 필요도 없으며 나이를 먹고 자라서도 완전해질 수 없다는 작품의 태도와 연결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이쿠하라 쿠니히코의「돌아가는 펭귄드럼」, 혹은 신보 아키유키의「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앞서 언급한 야마다 나오코의「목소리의 형태」등 애니메이션 업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거나「플립 플래퍼즈」등의 독보적인 자취를 남긴 작품들의 언급이 나온 것은「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가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새롭게 창조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사회적인 문제가 자살, 권력 위계형 성폭력, 한 부모 가정, 스토커, 베르테르 효과, 학교폭력, 성매매, 성 소수자 문제 등등 나열하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들뿐임에도, 이들을 다루는 것에 있어 거침이 없고 또 이들 모두를 다룸에서도 어느 하나도 가볍고 우습게 여기지 않는 것은「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에그 세계로 주인공 4인방을 이끈 존재인 아카와 우라아카가 일본에서 SNS의 계정(어카운트), 뒷계정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가 어떻게 이런 사회문제와 폭력, 트라우마,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를 다층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를 한층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작품을 보며 함부로 어떤 상황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마치 SNS에서 일방적으로 전개된 피해와 가해의 전시일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안겨주며, 작품 내외적으로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전개와 그 어떠한 예측도 그럴싸해 보이는「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의 전개는 SNS의 속성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해석은「원에그」의 에그 세계 속 등장하는 크리쳐의 이름이 본체만체, 즉 방관자를 지칭한다는 것을 떠올렸을 때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시청자들은「원에그」의 주인공들을 응원하거나, 아카 우라아카와 함께 지켜보고 때론 온·오프라인 상의 본체만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트위터 속 온갖 폭로와 날조, 비방들, 빈첸 이후로 수면 위로 떠 오른 자해와 우울증, 사유리가 선택한 한부모 가정 형태, 온갖 학교 폭력 가해 사실 폭로 등 수많은 사회적인 이슈는, 현 사회가 얼마나 이런 것들에 익숙해 있지 않았는지, 또 바라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는지를 증명한다. 이런 수많은 이슈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만큼 적절한 작품이 더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