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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 샤베트 Mar 31. 2021

[곰곰곰베어]

부담스러운 건 싫으니까 편안함에 올인하려고 합니다

*본 글은 애니메이션 전문 웹진 <아니나>에 2020년 12월 11일 기고한 글입니다. (http://anination.net/Content?cd=view&ContentCode=161&CategoryCode=1&SortCode=2)





※ 본 글에는「곰곰곰베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양산형 애니가 늘어가고, 애니들의 전반적인 퀄리티 지적이 많아진 요즘, 고정적 수요층을 타겟으로 안일한 기획을 통해 만들어진 해당 부류의 애니메이션들은 매년 나오는 추석/설 명절 시즌의 가족영화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근래에도 충분히 잘 만들어진 애니가 없지는 않지만, 라이트 노벨 원작(특히 이세계물)의 홍보용 애니, 혹은 안일한 여성 캐릭터(및 부가상품) 팔이를 위한 애니들이 10~20년 전에 비해 많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산형 작품들에 대한 지적이 한국영화계에 끊임없이 나오는 것 또한 비슷하다.)



  이러한 양산형 작품들이 전반적인 애니 시장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는 것은 맞겠으나, 가끔은 이런 작품들 중에서도 나름의 즐길 지점을 찾을 수 있는 작품들 또한 있다. 


  올해 초 방영작인 [아픈 건 싫으니까 방어력에 올인하려고 합니다]나 [여성향 게임의 파멸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 영애로 환생해버렸다] 같은 작품들만 하더라도, ‘과연 이들이 양산형 애니라고 해서 나름의 매력이나 가치를 찾을 수 없나?’를 생각해봤을 때, 분명 흥행에 성공하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나름의 유효한 포인트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 이번 분기에도 어김없이 ‘양산형’, ‘복제품’이라는 지적을 피해가지 못한 [너와 나의 최후의 전장, 혹은 세계가 시작하는 성전], [뒤떨어진 후르츠 타르트], [신들에게 주워진 남자], [곰곰곰베어] 같은 애니들이 방영 중이다. 그 중 [곰곰곰베어]는 가끔은 양산형, 안일한 애니라도 괜찮을 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계속 가지게 만드는 애니라 할 수 있겠다.





뻔한 설정



  줄거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곰곰곰베어]는 VRMMO게임을 즐기던 비범한 머리를 지닌(무려 주식으로 돈을 벌어 부모의 해외여행 자금을 대는) 15세 소녀 유나는 여느 날처럼 게임을 즐기기 위해 로그인을 하는 와중에 이상한 설문에 응답을 한 뒤 그대로 본인 레벨에 따라 진화하는 곰장비들과 함께 이세계에 전생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그 뒤로는 귀여운 (전신곰잠옷과 곰장갑이 한 세트인) 곰장비를 장착한 먼치킨 소녀와 그 소녀를 의지하고 따라다니는 더 어린 소녀들의 귀여운 일상,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귀여운 곰장비를 장착한) 먼치킨 소녀의 (곰과 베어가 꼭 들어가는 스킬들을 사용한) 활약, 그리고 소녀들을 서포트 하는 성숙한 어른들을 둘러싼 일상이 이어진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예상 그대로의 애니라 할 수 있겠다.





목적에 충실한 애니



  [곰곰곰베어]는 따지고보면 라이트노벨, 특히 이세계 전생 테마의 라이트노벨 중에서도 성의 없는 글로 유명한 라노벨이다. 원작자마저도 이게 왜 팔리고 애니화까지 됐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어찌 보면 머리를 비우고 편한 마음으로 썼다고 한 [아픈 건 싫으니까 방어력에 올인하려고 합니다]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구구절절하게 [곰곰곰베어]의 캐릭터를 대하는 자세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거창한 목표 없이, 매화 24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부드러운 색감의 동화적인 배경과 유순한 캐릭터들, 이들의 중심인 곰장비를 착용하고 온갖 곰형태의 스킬을 사용하는 주인공까지, 보는 이들의 머리를 잠시 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애니에 설정 오류나 스토리의 빈약함을 따지는 것은 서순이 틀렸으니 말이다. 후술할 캐릭터성과도 연결되는 지점이지만, 이 애니에서 먼치킨 능력을 살려 화려한 액션까지 바라는 것은 과욕이기도 하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러닝타임 동안 머리를 식히고 눈을 쉬게 하고 속이 편해지는 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류의 애니에게 복합적으로 잘 설계된 판타지 세계관과 고난과 역경의 사건 및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페이트 제로]를 보면서 너무 음침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불평하는 격이며, [즐겁게 놀아보세]를 보고 지나치게 가볍고 시끄럽다고 불평하는 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곰곰곰베어]는 본래의 힐링이라는 목적에 매우 충실하며, 이를 보는 시청자들 또한 그 목적을 인지한 채 [곰곰곰베어]를 시청한다면, 누군가에게는 해당 분기의 [주술회전]이나 [반요 야샤히메], [아쿠다마 드라이브]보다도 더 잘 맞는 애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극장에 갔을 때 [다크나이트]보다 [엑시트]가 더 땡기는 날이 있듯, 가끔은 [곰곰곰베어] 같은 적당한 애니가 더 즐거울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적절한 캐릭터 설계



  [곰곰곰베어]가 특유의 포인트를 살려 시청자들에게 어필이 가능한 것은, 크게 보자면 어이없을 정도로 도배된 곰(베어)스킬이 무척이나 귀여우며, 이를 향유하는 소녀들의 일상 또한 마찬가지로 모나지 않게 귀엽다는 점일 것이고, 좀 더 진지하게 뜯어보자면 그 사건들의 중심인 주인공 유나의 캐릭터가 꽤나 적절한 선을 지키며 모두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설계된 점을 들 수 있겠다.


  같은 양산형이라 하더라도 세계관이나 인물 관계, 캐릭터 설정 등은 시청자들이 작품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에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런 시점에서 생각해보자면, [곰곰곰베어]는 적어도 보는 이들이 특정 연령대의 캐릭터들을 그 연령에 맞는 언행을 통해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설계된 애니다. (특히나 이 부분은 수많은 소위 ‘치유계’ 애니들이 실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유나는 여전히 청소년기의 미완성된 인격 측면에서 부족함을 가끔 드러내지만, 이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고민은 어른들과 유나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최대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는 그림이 이어진다. 유나의 성우가 과하게 어리지도 성숙하지도 않고, 적절하게 시니컬하면서도 때론 중2병스럽고, 풋풋하면서도 마냥 유약한 이미지는 아닌 목소리로 유나를 연기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유나의 캐릭터 설계와 잘 맞아떨어지는 캐릭터 소화라 할 수 있겠다.


  유나를 따르는 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은 귀엽긴 하나 그저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귀여운 묘사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언니와 여동생의 관계에 가까운 묘사를 통해) 때론 미숙하고 때론 진지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유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미숙함은 자연스러운 것임을 꾸준히 조명한다. 유나의 대부분의 먼치킨적인 활약(과 이를 보조하는 어른들)의 행동이 결국 이러한 ‘아이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점은, 소동에 가깝게 그려지는 유나의 모험담과 다른 소녀들과의 상호작용이 부담스럽거나 과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만드는 긍정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유나의 고아원 아이들과의 관계는 이러한 작품의 태도를 대놓고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평결



  [곰곰곰베어]는 절대 뛰어난 애니도 아니고 꼭 챙겨봐야 할 문제작은 더더욱 아닌, 그저 평범하고 또 평범한 애니다. 그럼에도 귀여운 그림체와 귀여운 캐릭터들을 과하게 모에화시키지 않고 아이들을 스토리에 중심에 넣음에 있어 적절한 접근을 취하며, 치유의 목적도 적당하게 소화해내는 애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모에화나, 어줍잖게 진지한 척하며 빈곤한 상상력과 스토리 구상을 덮기 위해 애를 쓰는 수많은 이세계물에 지친(그럼에도 이세계물에 손이 가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중간만 가도 평균 이상은 한다는 표현이 딱 맞는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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