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길베르트’라는 이정표
*본 글은 애니메이션 전문 웹진 <아니나>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anination.net/Content?cd=view&ContentCode=181&CategoryCode=1&SortCode=2)
※ 본 글에는「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 4월부터 연기에 연기를 거듭해 겨우 이번 분기에 개봉하게 된 또 하나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자 18년도의 히트작인 TV 시리즈의 후속(이자 완결)작, [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작년 쿄애니의 참사 이후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젝트다. 이 애니메이션을 완성시키기 위한 노력이 쿄애니 재건으로 직결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의 의미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어딘가 잘못된 느낌이 분명 있었음에도 신파 요소를 꽤나 효과적으로 사용한 TVA의 후속인 이번 극장판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분명 컸고, 스스로도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한 마음을 가지며 극장에 찾아갔다. 안타깝게도, 그 기대는 엔딩곡인 TRUE의 [Will]이 흘러나오는 순간, 이번 극장판이 TVA와 외전인 [영원과 자동수기인형]만도 못한, 시리즈의 저점이었다는 아쉬움으로 변해버린다.
TVA로부터의 적절한 계승
사실 이번 극장판의 구성 자체는 꽤나 유효했다. TV 시리즈의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평이 좋았던(그리고 가장 신파 요소가 짙었던), 10화의 후일담으로부터 시작해 액자식 구성을 취해 바이올렛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발자취를 쫓아가는 구성은, 시작부터 이번 극장판이 본편에 충실할 것이란 기대를 품게 만든다.
기존의 작화와는 조금 다르 스타일로 완성된 최종장은 그럼에도 기존 시리즈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 않을 만큼의 정성이 담겨 있고, Evan Call의 OST는 여전히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애매한)근현대 유럽 배경과 신파 가득한 스토리에 알맞은 좋은 음악들이다.
TVA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으로 산뜻하게 시작하는 극장판은 이내 기존 시리즈의 이야기들처럼 병원의 한 소년의 편지 대필 에피소드를 이어 나간다. 해당 에피소드는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기존 옴니버스 에피소드들이 그러했듯, 꽤나 뻔한 구성을 취하지만 어쨌거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의 감동을 챙겨준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어쨌거나 이번 극장판의 최종 목표인, 바이올렛과 길베르트의 이야기를 풀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 길베르트와 바이올렛의 복잡한 사정과 각자의 입장으로 인해 전해지지 못하는 속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길베르트와 가장 비슷한 입장의 의뢰인을 차용한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기존 TVA의 분위기를 어느정도 계승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시리즈의 마지막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극장판은, 아쉽게도 막 죽음을 눈 앞에 둔 소년 의뢰인만도 못한 길베르트의 미숙함이 비교되게 하는 안타까움을 남긴다.
캐릭터의 희생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시리즈 내내 품고 있던 시한폭탄과도 같던 문제는, 길베르트가 바이올렛과 헤어지기 직전 남긴 ‘사랑’이라는 말의 뜻이 어떤 의미인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했음에도, 이것이 ‘연애대상’으로써의 사랑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내내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올렛과 길베르트의 관계는, 바이올렛이 반강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불안하고 불평등한 관계다. 처음 둘의 관계를 봤을 때 떠오른 (전 미국 대통령)그로버 클리블랜드와 프랜시스 클리블랜드의 관계보다도 훨씬 많은 불안한 요소가 존재하는, 불균형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바이올렛의 인격이 형성되기 전부터 ‘보호자’의 역할을 맡던 길베르트의 위치는 바이올렛의 의존(+ 생존)과도 직결되는 요소였으며, 전쟁의 후유증을 겪고 불완전한 인격을 완성시켜 나가는 본편의 내용은 결국 바이올렛의 자아가 길베르트로부터의 의존을 벗어던지고 성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길베르트와 함께한 (인격적)유아기를 거쳐 하진스와 카틀레야의(유사 부모-자식 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관심과 보호 아래 대필가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사회의 여러 인물과도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을만큼 성장한 극장판의 바이올렛은, 길베르트의 서사를 위해 그동안 ‘바이올렛 에버가든’으로서 쌓아올린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길베르트
[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 속 길베르트는 인격적으로 미숙하고 성장하지 못한 캐릭터다. 물론 길베르트의 경우 어린 바이올렛을 전쟁에 끌어들인 장본인 중 하나라는 자각과 죄책감이 전쟁의 후유증에 더해졌다고는 하지만, 그 하나의 차이로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고립을 선택한 길베르트는 동시기 바이올렛의 성장과 대비되어 너무나도 큰 괴리감을 준다. 바이올렛의 인격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을 길베르트가 자신을 떠나 있던 바이올렛이 성장하고 되려 자신을 구원해줄 존재가 되어 돌아온다는 서사는 너무나도 편리하고 안이한 서사다.
애초부터 미숙한 존재였던 길베르트가 바이올렛을 거두고 키우는 과정에서 둘의 관계는 불안정했고, 공의존의 관계였다. 전쟁과는 맞지 않는 인간으로 꾸준히 그려졌던 길베르트에게 바이올렛의 존재는 단지 돌봄의 대상이 아닌, 일종의 양심의 도피처이자 위안이었음은 분명했다.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공의존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길베르트와 바이올렛이 이성애적인 ‘사랑’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바이올렛만의 노력이 아닌, 길베르트 스스로도 기존의 관계에 대한 성찰과 성장은 물론 바이올렛과의 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어떤 성장이 수반되어야 했음은 당연했다. 별 이유도 없이 길베르트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예속되어버린 극장판의 바이올렛의 길베르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은 당연히 납득이 가지 않으며, 오히려 바이올렛의 그간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공의존적 관계가 그대로라는 의심마저 들게 하는 아쉬운 선택이다.
그러나 [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이에 철저하게 실패했고, 이 작품의 최대 패착은 동격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장한 바이올렛을 고작 본편의 시점에서 1도 인격적인 성장을 이뤄내지 못한 길베르트를 구원하기 위한 ‘성녀’ 프레임으로 소모해버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평결
결국 [바이올렛 에버가든] 시리즈의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이자 정해진 결말이었던 길베르트라는 이정표에 다다른 [극장판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정작 제일 중요했던 길베르트라는 캐릭터 구축에 실패함으로써 기존의 모든 이야기들이 잘못된 결말을 향해 달려왔던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긴, 찝찝한 마무리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