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라는 이름의 인생 10

10. 칼이 없으면 방패로 – 파워피쳐와 기교파

by Equinox

[야구라는 이름의 인생 – 10. 칼이 없으면 방패로 – 파워피쳐와 기교파]


현역 최고의 투수를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없이 로저 클레멘스를 말한다. 현역 뿐만 아니라, 역대 최고의 반열에 이름을 내밀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예상되는 그는, [로켓]이라는 별명답게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파워피쳐(강속구투수)의 대명사이다. 약관의 나이에 빅리그에 입성했던 그 시절부터, 불혹을 넘긴 지금까지, 여전히 95mph(약 153km/h)의 공으로 시원시원하게 타자를 윽박질러 나간다.

비단 로켓뿐만 아니라, 시대를 풍미했던 대투수들은 대부분 파워피쳐였다. 그들은 150km/h를 상회하는 공으로 인간의 동체시각과 반응한계를 시험하면서, 당대 타자들의 눈물을 먹고 살았다. 하지만, 이런 강속구는 아무나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진정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불세출의 천재들이며, 범인(凡人)들로서는 그저 감탄밖에는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현실에서도 이런 소수의 천재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최근 고승덕 변호사의 수기를 탐독하고 있는데, 고 변호사는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 행정고시 수석 합격, 외무고시 차석 합격에, 하버드•예일•컬럼비아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국 뉴욕 등 4개 주 변호사 등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신 이력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독자 서평에, “보통 사람들은 읽지 말 것. 그의 천재성에, 평범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원망하게 됨.”이라는 말이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천재들의 활약에 그저 감탄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강속구를 뿌리지 못하는 자들은 투수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야구를 그만두어야 할까?

수년전에 재미있는 TV광고를 접한 적이 있다. Jamie Moyer라는 62년생 투수를 모델로 한, 시애틀 매리너스의 구단 홍보 CF였다. 제이미 모이어는 원래도 빠른 공을 뿌리는 선수가 아닌데다, 나이도 40줄에 접어들고 있어서, fireball(강속구)과는 거리가 먼 투수. 광고의 내용은 이러한 모이어의 특징을 이용해서 코믹하게 만들어졌다. 내용인즉 다음과 같다.

불펜(투수들이 연습하는 곳)에서 투수들이 연습투구를 하고 있다. 그 중에는 모이어의 모습도 보인다. 구단 관계자들은 소속 선수들의 구속(球速)을 체크하기 위해, 포수 뒤에서 스피드건(구속을 재는 기기)을 겨누고 있다. 그런데, 모이어를 겨냥한 스피드건에 98, 99라는 숫자가 연신 찍히는 것이 아닌가! 급기야 꿈의 구속이라는 세자리 숫자, 100을 찍어버린 모이어.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어리둥절해 한다. 그러자 그 공을 받아내던 포수의 한 마디. “Not miles, but kilometers. (마일이 아니고 킬로미터야.)”

1마일은 약 1.61킬로미터라는 미터법의 차이를 이용한 코믹광고로서, 100km/h는 야구와 인연이 없는 일반인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어렵지 않게 던질 수 있는 구속이다. 모이어의 공이 그만큼 느리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 하지만, 그는 2003년 시즌에 특급투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20승을 달성했다. 게다가 나이 40줄에 접어들어서 20승 이상을 달성한 투수는 그를 포함해서 현대야구에 단 다섯 명밖에 없다고 하니, 새삼 놀라울 뿐이다. 설마 방망이로 먹고 사는 빅리그의 타자들이 갑자기 경로사상을 깨닫기라도 했단 말인가.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들이 모인 메이저리그에서, 빠르지 않은 구속으로도 얼마든지 투수 노릇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전장(戰場)에서 전사(戰士)들이 칼이 부러졌다고 전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칼이 없으면 방패를 휘둘러서라도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 파워피쳐의 상대적 개념인 기교파 투수라는 말은 빠르지 않은 구속을 만회하기 위해, 갖가지 변화구와 수싸움으로 무장한 투수들을 일컫는 말이다. 신이 천재들에게만 부여한 칼을 갖지 못한 대신, 방패라는 자신만의 무기를 개발해서 전장에서 훌륭하게 살아남은 그들. 마찬가지로 세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범재(凡才)들도 천재보다 부족한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천재는 천재.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지상명제인 범재들과는 달리, 그들은 전장을 지배하지 않는가. 칼을 가진 자는 방패를 가진 자보다 필연적으로 월등한 전과를 거두게 되지 않은가.]

위와 같은 탄식을 할 독자들에게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이가 있다. 기교파 투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Greg Maddux.

매덕스는 현역 투수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로켓과 견줄 수 있는 투수이다. 4년 연속 사이영(최고투수상) 수상(1992~1995), 13년 연속 골드글러브(포지션별 최고수비수에게 수여하는 상) 수상에 빛나며, 통산 방어율도 2점대에, 2004년 시즌을 앞둔 현재 통산 289승으로 역대 23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투수이다. 현역들 가운데서는 거의 대부분의 기록이 로켓에 이은 2위이며, 놀라운 것은, 기교파인 그가 통산 2,765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역 가운데서는 로켓, 랜디 존슨에 이은 3위) 로켓보다 약간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은퇴할 때 즈음에는 지금의 이 기록들이 더 놀라운 것으로 바뀌어있을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공은 어지간한 강속구 투수들이 체인지업(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기 위해 느리게 던지는 공)보다 더 느려서 채 90마일(약 145km/h)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실상부한 메이저리그의 대표투수이며, 단순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리그를 지배한 자이다.

글을 써내려 가다보니, 진정한 천재는 신으로부터 많은 재능을 부여받은 자가 아니라, 자기에게 허락된 재능을 극대화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디트로이트의 Matt Anderson이라는 투수는 103마일(약 166km/h)의 무시무시한 공을 뿌리다가, 제구를 위해 100마일(약 161km/h)로 구속을 낮추었다는, 인간같지도 않은 신체를 가졌다. 하지만, 그는 그 나이대의 로켓에 견주기는커녕, 갖은 부상으로 제 몫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마이너리그의 수많은 투수들이 매덕스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빅리그 마운드에 서보지 못하고 사라져가고 있으니 말이다.

요리사가 앙꼬빵을 만들 때, 앙꼬를 더 많이 넣은 빵과 더 적게 넣은 빵은 있을 수 있지만, 아예 넣지 않는 빵은 없듯이, 신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재능의 많고 적음은 차이가 있을지언정, 재능을 갖지 못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칼이 아니라 방패라 하더라도, 전장에서 죽느냐, 사느냐, 아니면 전장을 지배하느냐는 결국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 기교파 투수이면서도 리그를 지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야구라는 이름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주) 이글은 2004년에 작성된 글이며, 이 당시 현역 선수들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이므로, 이후 약물 등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이 시점에서는 본격적인 공론화가 되지 않았음을 참고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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