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라는 이름의 인생 9

9. 자신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 커맨드

by Equinox

[야구라는 이름의 인생 – 9. 자신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 커맨드]


“Control is what stands between Ankiel and the ability to be an ace. His trouble is not command, but rather throwing strikes consistently. (제구력은 그가 에이스가 되는데 중요한 열쇠이다. 그의 문제는 커맨드가 아니고, 스트라이크를 꾸준히 던지는 것에 있다.)”

–Scouting Notebook 2001(Stats社 발행)의 Rick Ankiel 편에서 발췌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고 한다. 한 경기가 끝나고 나서 나오는 box score는 물론, 년간 기록, 통산 기록 등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기록들을 보고 있노라면, 스포츠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 수학, 특히 통계 수업을 듣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이다. 이러한 각종 통계 기록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면서 더더욱 발전되고 있으니, 가히 [기록의 스포츠]라는 별칭이 어울린다 하겠다.

이러한 각종 기록과 통계들은, 선수들의 능력을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선수들 개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가 기록되어있는 scouting notebook에서도 다소 생소한 용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투수의 특징을 기술하는데 있어, velocity, movement, stuff, control, delivery, location, command 등 사전의 1차적 의미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Velocity는 공의 속도(球速), movement는 공의 움직임, stuff는 공의 위력(球威)이며, ‘배달’이라는 의미의 delivery는 투수가 공을 던지는 모습을 일컫음이니,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제어한다’는 의미의 control, ‘위치설정’이라는 의미의 location, 그리고 ‘명령한다’는 의미의 command는 수년간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조차도 뚜렷하게 구별하지 않고 쓰는 경우가 많은 단어들이다. 하지만,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문구는, 적어도 control과 command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Rick Ankiel은, 20살 약관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진입하여, 11승 7패 방어율 3.50의 성적으로, 2000년 신인상 투표에서도 접전 끝에 2위를 기록하는 등, 루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선수이다. 스무살의 어린 선수가 리그의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을 상대로, 탈삼진율 리그 2위(9이닝당 10.0개)를 기록했을 정도로, 뛰어난 구위를 지녔지만, 타자 한 명당 최다 투구수(4.20개) 리그 1위를 기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을 원하는 위치에 정교하게 꽂아 넣을 수 있는 능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유형의 투수이다. 하지만, scouting notebook의 저자(著者)는 그의 control을 문제 삼았을지언정, command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럼 command란 대체 무엇인가.

 

command [kmǽnd, -mnd | -mnd] v., n.
명령하다→ 지배하다→ (우위에 서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다→ 내려다보다

 

모든 야구경기는 투수의 손끝에서 시작하며, 관중, 선수, 감독, 심판 등 스태디엄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것도 투수이다. 또한, 투수가 서는 곳, 마운드는 그라운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경기를 지배하고 명령하는 자리로서 이보다 더 적격인 곳이 있을까. 야구경기는 투수로 하여금, 지배하고, 명령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Rick Ankiel의 2000년을 보자. 그는 원하는 곳에 공을 넣는(location) 정교한 제구력(control)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공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자신있게 공을 뿌린 결과, 리그 2위에 해당하는 탈삼진율을 기록했다. 타자를 상대로 명령하고, 게임을 지배하지 않고서는, 스무살의 루키가 그만큼의 성적을 거둘 수는 없었다고 판단하였기에, Scouting notebook은 그의 command를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다.

부상 이전과 이후의 박찬호를 비교해보면, command의 중요성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박찬호 선수의 경우 velocity와 movement는 원래부터 특급이었지만, 제구력은 거의 낙제점 수준이었다. 이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볼넷 허용에서 리그 5위를 벗어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부상 이전의 그는 수많은 타자들의 눈물을 먹고 살던 리그 탑 클래스 투수였다. 비록 정교한 공은 아니었지만, 스스로의 공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있게 공을 뿌린 결과였다. 하지만, 부상의 여파로 공의 위력이 감소하면서, 그는 자신의 공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고, 경기를 지배하고 명령하지 못하게 된 그는 처절한 타자들의 응징을 피할 수 없었다. 자신감을 상실한 투수는 더 이상 타자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수많은 마이너리그의 투수들이, 뛰어난 stuff를 가지고도, 빅리그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경기를 지배하는 능력, 즉 command가 결여되어있기 때문이다. 공에 대한 자신감을 갖기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닌 것이다.

자신감에 모든 것이 달려있음은 비단 투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간혹 주변을 보면, 실제 역량보다 훨씬 큰 성취를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신의 역량에 못 미치는 결과만을 거두는 사람도 있음을 보게 된다. 전자의 경우, 매사에 활기가 넘치고,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 소극적이며, 매사에 주저함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자신감은 자신의 역량을 배가시켜준다.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 진출을 해냈던 것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담대했던 히딩크 감독의 command가 모든 선수에게 미친 결과였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경이적인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한국의 FIFA 랭킹은 4위는 커녕, 10위권에도 들어서지 못했다. 즉, 실제의 역량으로는 4강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지만, 결국 자신감이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올려놓은 것이다.

만일 여기까지 읽고, 무턱대고 자신감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자신감의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자신감은 하루아침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 축구의 자신감은 히딩크가 주도한 강도높은 체력훈련을 바탕으로 생겨났으며, Rick Ankiel과 박찬호는 뛰어난 velocity, movement, stuff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실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자신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설령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오래갈 수 없다. 꾸준한 실력연마를 바탕으로 강인한 정신력을 쌓는 것만이 경기와 사람살이에서 command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는 방법이다.

하지만, 한번 잃어버린 자신감은 쉽게 회복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000년 9월, Rick Ankiel의 소속팀 St. Louis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가운데 단 8개 팀만 참가하는 가을잔치,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팀은 스무살의 루키에게 1차전 선발을 맡겼다. 정규시즌에서 놀라운 루키 센세이션을 일으킨 약관의 청년에게 높은 기대감을 보인 셈이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플레이오프의 한 경기는 정규시즌의 한 경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중압감을 지녔으며, 이 중압감이 Ankiel의 command를 무너뜨린 것이다. 플레이오프 첫 등판에서 8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6개의 볼넷을 허용한 그는, 두번째 등판에서 겨우 4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았고, 무려 5개의 볼넷을 내주고 만다. 이렇게 무너져버린 Ankiel은, 일시적인 부진이길 바라는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 이듬해인 2001시즌, 단 6번의 등판에서 24이닝동안 무려 25개의 볼넷을 기록하면서, 쓸쓸히 마이너리그로 내려간다. 그는 2004년 3월 현재, 아직도 마이너리그를 전전하고 있다. 1)

이미 마운드위에서 경기를 지배했던 기억을 가졌었기에,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다. 주변의 기대와 우려, 안타까움이 섞인 시선은 어지간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하지만 여기, 또 한명의 투수가 기나긴 인고(忍苦)의 시간을 이겨내고, 잃어버린 command를 찾기 위해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2003년에 거의 부상치료에만 전념했던 박찬호 선수가 2004시즌을 앞둔 시범경기에서 자신의 예전 구속(球速)을 제법 회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직 시범경기의 결과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잃어버린 자신감을 다시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Ankiel의 사례에서 알 수 있었기에, 그의 고무적(鼓舞的)인 성과에 기대를 갖게 된다.

그가 이를 악물고 던지는 공 하나하나는, 시련과 좌절로 자신감을 잃어버린 많은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이름의 야구에서 자신감을 갖고 command하라는….”



주1) 글을 작성한 시점은 2004년이다. 그는 결국 메이저리그 마운드로 복귀하는 것에 실패했고, 타자로 전향했다.

이전 09화야구라는 이름의 인생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