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단상 - 마무리(Closer)에 대하여 (제1부)

영광을 누리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by Equinox

1.


야구팬들이 홈구장을 찾으면서 가장 기대하는 순간은 무엇이 있을까? 끝내기 홈런같은 극적인 상황은 그리 자주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를 하면서 야구장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교적 기대할 수 있는 상황 가운데 홈팬들의 도파민을 터뜨릴 수 있는 순간은 무엇일까?


2.


필자가 종종 찾는 한 KBO 구단의 홈구장 외야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OO에는 9회말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티켓값을 주고 관람하는 경기에서 무려 1/18 분량의 경기를 생략한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싶겠지만, 야구에서는 합법적(?)으로 이닝을 삭제하는 마법이 존재한다. 바로 홈팀이 이기고 있는 9회초. 마무리 투수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홈팬들의 도파민이 터지는 순간이다.


3.


야구선수들은 대부분 등장음악이 존재한다. 하지만, 등장음악만으로 홈팬들을 전율하게 만드는 등장음악은 대부분 마무리 투수의 그것이다. 현재 MLB의 양 리그에서 매년 최고의 마무리 투수에게 수상하는 상의 이름은 AL의 마리아노 리베라, NL의 트레버 호프먼이고, 그들은 현역시절 최고의 등장음악으로 홈팬들을 열광케 했다.


9회초가 시작되기 직전,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 전설적인 기타 리프와 함께 양키 스타디움 외야 불펜의 문이 열리면, 등번호 42번만 적힌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의 주인공이 불펜에서 걸어나온다. 그 순간 스타디움의 열기는 하늘을 뚫으며 솟구친다. 단연코 그 어떤 락스타의 등장보다 열광적인 장면이 야구장에서 연출된다.


https://youtu.be/rUTirIk75vg?si=OrdB_pUxWyc3GI8N


샌디에이고의 홈구장도 마찬가지다. 호프먼의 등장곡은 Hell’s bell. 지옥의 종소리이다. 전율의 종소리가 구장에 울려퍼지면, 홈팬도, (아마도?) 상대팀 선수들도 전율에 휩싸인다. 합법적으로 9회말을 삭제하기 위해 그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https://youtu.be/jKWrINmMXp8?si=NLg_WTiwJRaB3Zf1


전설의 마무리들만이 아니다. 현역 마무리 투수들도 모두들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등장음악과, 그에 걸맞는 화려한 특수효과를 가지고 마운드에 오른다. 얼마전 뉴욕 메츠 홈구장인 시티 필드는 마무리 투수인 에드윈 디아즈의 이벤트를 마련한 바 있다. 그의 등장곡은 Narco. 그의 등장에 더욱 극적인 효과를 불어넣기 위해, 호주 출신인 원곡의 트럼펫 연주자를 모셔온 것이다. 하지만, 첫 날은 팀이 이기는 상황이 아니라서 불발(!!). 둘째 날엔 겨우 마무리의 등장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9회초 시작 직전, 시티 필드는 온통 클럽 분위기로 휩싸였다.


https://youtu.be/8BYSp2pzP0Y?si=kn54-mwftf5eqmkG


4.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마무리 투수인만큼 그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야구의 주요 기록 가운데, 마무리 투수가 관여하는 것들에는 S(Save), BS(Blown Save), GF(Game finished)가 있다. 이 가운데 GF는 경기를 끝냈다는 의미이며, 대부분 팀 내 주전 마무리 투수들이 가져가는 기록이다. 대부분의 다른 투수들이 한계 상황에서 위기를 맞이하면, 다른 투수에게 공을 건네고 마운드를 내려올 수 있지만, 마무리(Closer)는 말 그대로 문을 닫는 자. 그 뒤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가 올라오는 대부분의 상황은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투수도 없다. 위기가 닥쳐도 오롯이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선발투수는 6이닝 동안 3자책점 이내만 기록해도 QS(Quality Start)라는 훈장을 달아주지만, 마무리 투수는 단 1이닝 1실점만으로도 역적이 되어버린다. 그가 허용하는 실점은 해당 경기의 패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팀의 승패를 홀로 짊어지는 고독한 존재. 그것이 마무리 투수인 것이다.


(다음 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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