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단상 - 마무리(Closer)에 대하여 (제2부)

그깟 공놀이!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by Equinox

5.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이 있다. 투수가 공을 던지지 않으면 아예 시작이 되지 않는 경기의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구는 전통적으로 투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방향의 많은 불문율들이 존재한다. 요즘은 좀 변화하는 분위기지만, 예전에는 투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타자는 반드시 응징을 당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투수는 삼진을 잡고나서 마운드 위에서 포효를 하더라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데, 타자는 홈런을 치고나서 자신의 타구를 감상하는 모습만 보여도, 다음 타석에서 위협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투수의 자신감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도 모두 동의한 불문율이라 할 수 있다. 투수는 자신감 하나로 먹고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6.


2001년 월드시리즈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뉴욕 양키스의 4연속 우승 도전과 이를 저지하는 트윈 타워. 흡사 반지의 전쟁을 방불케 한 그 이야기들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는 단연 애리조나의 마무리투수 김병현에 관한 것이다.


2001년의 김병현은 엄청난 활약으로 팀을 가을야구로 이끌었다. 불펜 투수가 98이닝이나 책임진 것도 놀랍지만, 승리기여도(bWAR) 3.1은 현재 기준으로도 경이로운 수준이다. (앞서 언급한 메츠의 특급 마무리 투수 에드윈 디아즈가 최고 정점을 찍었던 2022년의 승리기여도가 3.2이다.)


그런 그가 월드시리즈에 등장했다. 양팀 50명 (당시는 팀 당 로스터가 25인이었음) 가운데 최연소였던 그는 월드시리즈 4차전 8회말에 양키 스타디움의 마운드에 올랐다. 그 당시 양키 스타디움은, 현재의 양키 스타디움을 뛰어넘는 압도적으로 웅장한 크기를 자랑했으며, 만석의 양키 스타디움이 뿜어내는 열기는 스물두살의 왜소한(?) 동양청년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뜨거웠다. 게다가 상대는 이미 지난 5년동안 4회의 우승을 달성한 관록과 아우라를 가진 양키 타자들. 만약 필자였다면, 그 마운드에 서는 것조차 힘겨웠을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8회말에 등장한 김병현은, 3타자 3삼진. Strikeout the side를 완성하며 양키 스타디움을 순식간에 도서관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짖궂은 야구의 신은, 평면적인 야구의 전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9회말 2사까지 파죽지세로 양키 타자들을 잡아나갈 때까지만 해도 성공적으로 문을 닫을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동점 홈런을, 10회말에는 역전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고개를 떨군다. 연장 10회가 되며 자정을 넘기며 11월이 된 뉴욕은, 당시 끝내기 홈런의 주인공인 데릭 지터에게 “Mr. November”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주1)


다음날 이어진 5차전. 전날과 똑같은 2점차의 리드 상황에서 9회말에 다시 등장한 김병현은, 마치 데자부와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9회말 2사까지 잡은 상황에서 터진 동점 홈런. 결국 그는 마운드 위에서 주저앉고 만다.


모든 감정 표현이 솔직한 스물두살의 청년 김병현은, 자신감도 표정에 드러나지만, 실망감 역시 그대로 드러난다. 마운드 위에서 주저앉은 모습도 그의 솔직한 심정이 드러난 것이리라. 그런데, 그를 교체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온 애리조나 밥 브렌리 감독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Keep your head up!”


경기를 질 수는 있어도, 투수가 고개를 떨궈서는 안된다는 그의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7.


경기 직후 현지 언론에서 거론된 이름이 있었다. 도니 무어 Donnie Moore.


1986년 캘리포니아 애인절스(현 LA 애인절스) 소속으로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ALCS, 월드시리즈 직전 라운드)에 진출한 그는, 5차전 팀이 5-4로 앞선 상황에서 9회에 등판했다. 그리고 아웃 카운트 하나만을 남긴 상황에서 역전 2점 홈런을 허용했고, 팀은 패배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소속팀은 이후 경기도 패배하며 시리즈를 내주었고,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왜 현지 언론이 김병현의 사례를 도니 무어의 사례와 비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도니 무어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무어는 팬들의 비난과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부상과 심리적 문제로 커리어가 급격히 무너진 그는, 결국 1989년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마무리 투수가 짊어져야 할 막대한 중압감. 그리고, 한번의 실수로 감당해야만 하는 결과는 스물두살의 청년에겐 너무 가혹한 것이기에 현지 언론은 김병현을 걱정하며 도니 무어의 사례를 거론한 것이었다.


다행히 애리조나는 월드시리즈를 우승했고, 김병현도 미소를 되찾았다. 그리고 김병현의 멘탈은 우리의 우려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듬해인 2002년 김병현은 최전성기를 맞는다.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마무리 투수로서는 경이적인 승리기여도(bWAR) 4.0을 기록한다. 앞서 언급한 NL 최고의 마무리 트레버 호프만이 전체 선수 경력을 통틀어 4점대 승리기여도를 기록한 것은 1998년 단 한 차례에 불과했으니, 김병현의 2002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8.


김병현의 선수시절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엉뚱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말도 못할 정도의 훈련광이지만, 자신이 등판하지 않을 때는 낮잠을 자거나 라커룸에서 비디오게임을 하는 등 마이웨이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중압감을 짊어져야 하는 마무리 투수에겐 아주 최적의 마인드셋이었다.


비단 김병현 뿐만 아니라, 다른 특출난 마무리 투수들은 독특한 마인드셋을 가진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러한 독특한 캐릭터와 마운드 위에서의 존재감 덕분에 마무리 투수들은 별명 부자인 경우가 많다.


“쿠바 미사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롤디스 채프먼 Aroldis Chapman은 시속 105마일에 달하는 불같은 강속구로도 유명하지만, 팀 케미스트리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마이웨이인 기질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2022년 가을 야구 직전에는, “가을야구 로스터 합류가 확정적이지 않으면 팀 훈련에 불참하겠다.”라고 해서,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이웨이적 기질은 경력에 마이너스가 되었을지언정, 그가 마무리투수로 롱런하는 비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https://youtu.be/j84huGSRcLs?si=KsqA9nLkwI8MKSzm


1점차 루상엔 2명의 주자. 하지만, 그는 주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저 거침없이 105마일의 불꽃을 뿌려댈 뿐. 타자를 삼진처리한 그는 잠시 마운드 위에서 정지동작을 취한다. 그리고는 씨익 미소를 짓는다. 그의 독특한 마운드셋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당대를 주름잡은 마무리들은 어찌보면 똘끼로 보일 듯한 개성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너던 파펠본도 그랬고, K-로드, 존 로커, 호세 발버데 등 심한 경우 징계와 법적 조치를 당하기까지 하는 등 마이웨이적 마인드 셋을 가진 마무리들이 즐비하다.


김병현도 만만치 않다. 그의 별명 “법규”가 말해주듯이 그는 맘에 들지 않으면 거침없이 중지를 세우곤 했다. 혹자는 그의 인성을 나무라곤 했지만, 그의 마이웨이적 마인드셋이 아니었다면, 그는 야구의 신들이 거주하는 올림푸스 산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를 비롯한 특급 마무리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그깟 공놀이. 너희들이 가끔 까불 수는 있어도 나만큼 잘 할 수는 없어!’


(다음 글로 이어짐)


주1) 여담이지만, 2001년은 뉴욕의 9.11 테러로 가을 야구가 늦게 치러지는 바람에 11월까지 월드시리즈가 이어졌고, 당시 4차전이 자정을 넘김으로써, 지터의 홈런은 공식적으로 11월에 기록한 홈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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