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커버린 원숭이의 오사카 여행

'어떤 하루'에 대해 쓰기

by 거짓말의 거짓말

사람의 흰자위는 다른 영장류와 달리 유독 크고 넓다.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대규모 협력이 필요했고, 넓고 큰 흰자위를 통해 말하지 않고도 대형 맘모스와 같은 동물을 효과적으로 사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협력적인 눈 가설'이다. '공막'이라고도 불리는 사람의 흰자위는 원숭이, 고릴라와 같은 다른 영장류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크고 넓다. 원숭이는 인간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면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만, 인간의 아기는 고개의 방향보다 눈동자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다고 한다. 사회적 소통 능력이 떨어지는 자폐아의 경우도 부모가 눈을 자주 마치면 자폐성향이 줄어든다고 한다. 때때로 사람은 백 마디 말보다 눈으로 더 많은 말을 한다.


3년 전 4월, 나는 일본 오사카를 혼자 여행 중이었다. 양팔을 들고 달리는 캐릭터 쿠리코상이 있는 도톤부리 인근에 숙소를 잡았다. 오사카의 대표적 사진 명소였지만 혼자였고, 사진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진을 남기진 않았다.


첫날은 도톤부리 시내 관광을 했다. 점심에는 미리 검색한 라멘 맛집을 찾아갔고, 저녁에는 내키는 데로 길을 걷다 눈에 띄는 라멘집에 들어갔다. 일본 음식 중에선 라멘을 가장 좋아한다. 행여라도 여행 중에 일본인 여자친구가 생기면 '라멘 먹고 갈래?'라고 물어볼 수 있을 텐데. 둘이 같이 라멘을 먹고 호텔에서 사랑을 나눈 뒤에 노곤해진 상태로 '사실 한국에서 라멘 먹고 갈래라는 말은 함께 사랑을 나누지 않을래 라는 뜻이야'라고 설명해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당시 나는 초대형 방안에 2층 침대 수십 개가 놓인 단체 게스트 하우스에서 잠을 잤다. '와사비 게스트 하우스'란 곳이었는데 행여나 그곳에서 일본인 여자 친구와 그런 일을 벌이게 된다면 지역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둘째 날은 오사카 성을 관광했다. 3~4주만 일찍 왔다면 오사카 성을 둘러싸고 있는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가장 저렴한 비행기 표를 예약했기 때문에 '저 나무가 벚꽃 나무구나'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층별 설명이 적힌 팸플릿을 봐가며 오사카성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사카 성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눈에 담고 내려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다. 얼마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표창을 던져 풍선을 터트리는 게임 같은 것도 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다도 체험장 같은 곳에 우연히 들려서 일본 전통 집과 정원을 구경했다. 혼자였으므로 발 닫는 데로 가고, 내키는 데로 할 수 있었다. 저녁에는 '오사카 주유패스'를 통해 무료로 갈 수 있는 일본식 온천에 갔다. 오사카 주유패스는 일본 대중교통과 오사카 수십 곳의 관광 명소를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패스 티켓이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 하루에 2~3곳만 가도 훨씬 이득이었다. 패스에는 온천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사실상 대형 목욕탕과 같은 구조에 목욕탕 일부가 야외에 있는 형태였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있는데 30~40대로 보이는 일본인 여성이 서슴없이 전라의 남자들 사이로 수건이나 옷가지 등을 챙기며 돌아다녔다. 만화책에서 남녀 혼탕에 관한 것을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적잖이 당황했다. 내부 탕에서 몸을 씻고 야외 온천으로 옮겼다. 대나무 정원에 마련된 1인용 대형 항아리 탕에도 들어가 보고 반신욕 탕도 들어갔다. 목침 베개를 베고 누우면 따뜻한 물이 등허리 쪽으로 졸졸 내려오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까 봤던 아주머니가 야외탕으로 들어와서 내 쪽으로 오셨다. 깜짝 놀라 나는 얼른 몸을 뒤집었다. 어차피 부끄러운 곳이 보여질 거라면 앞판보다는 뒤판이 나았다.


셋째 날은 도톤부리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히메지 성을 찾았다. '사무라이 디퍼 쿄우'나 '바람의 검심'과 같은 일본 만화책에서 보던 지방 호족의 고급 성 같았다. 오사카 성이 넓은 정원에 성이 하나 덜렁 있는 형태였다면 히메지 성은 훨씬 더 넓고 건물도 많았다. 수직적인 오사카 성과 달리 히메지 성은 성 내부를 수평적으로 걸으며 이곳저곳 둘러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오사카 성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고베에 들렸다. 고베의 상징인 고베 포트 타워의 야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고베 포트 타워 최고의 사진 맛집 장소인 '모자이크' 쇼핑몰로 갔다. 쇼핑몰을 한참 둘러보다 고베 포트 타워와 야경을 볼 수 있는 외부 테라스 같은 곳으로 나왔다. 그동안 많은 야경을 봐왔지만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예뻤다. 야경과 함께 아래로 보이는 갑판에서 나와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인인 듯한 사람도 있었다. 갑자기 혼자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맛있는 라멘도, 이 아름다운 풍경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발걸음 닫는 데로 골목골목을 혼자 누비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크게 싸우더라도 손을 잡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사람과 오늘 먹은 음식, 인상 깊었던 풍경,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을 함께 얘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묻는 것이다. '나부터 씻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조금은 조심스럽고 겁을 먹은 상태였다. 대신 나는 소설 '인간실격'의 요조처럼 익살의 가면으로 나의 두려움을 덮었다. 재미있고 웃긴 사람의 가면을 쓰고 나의 약점을 숨겼다. 하지만 가끔은 나도 누군가에게는, 적어도 어떤 한 사람에게는 나의 약점에 대해서도 나누고 싶었다. 내가 먼저 상대의 약점을 온전히 이해하고(물론 온전히 이해했다는 착각이겠지만), 그다음에 나의 부끄러운 부분에 대해서도 그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로 바닥은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의 약점을 담은 상자에 구멍을 뚫고 그의 손을 짚어넣는 정도까지 만이다. 절대로 상자를 다 열어서 '이것이 내 약점이야' 하고 훤히 보여주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은 인간으로 진화가 덜 된 원숭이 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난 눈의 대화에 서투르다. 그렇다고 말의 대화에 능숙한 것도 아니다. 익살의 가면을 통해 번지르르한 말의 성찬을 늘어놓을 수는 있지만 언제나 알맹이는 빠져 있다. 고베 모자이크의 갑판에서 설령 내가 누군가와 함께였다 할지라도 나는 '그 말'을 할 수 있었을까.


<2020.06.05 쓰담 클래스 7기 첫 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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