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의 가면보다 침묵의 가면이 더 나은 이유에 대해
*사진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John Noonan
1.
야마노 마이코는 문장을 또박또박 읽다가 교사가 발음을 교정해주자, 볼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곤경에 빠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조금도 주의를 흩트리지 않는다. 남학생들은 한숨을 쉬며 야마노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으, 예뻐 죽겠어! 라고 씌어져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 귀여운 몸짓 하나하나가 모두 손님을 끌려는 고도의 기술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 곁에 다가가 귀에다 대고 어릿광대, 라고 속삭여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철봉에서 떨어진 주인공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냉소를 흘리며, 일부러 그런 거 아니냐고 경고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 생각난다. 우등생인 주인공은 눈에 띄지 않게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꿰뚫어보는 존재에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교실을 그 소설의 무대로 상상해보면서 야마노를 어릿광대 같은 그 소설의 주인공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부를 못해' by 야마다 에이미 150p>
위 소설에 나오는 야마노 마이코는 실제로도 예쁜 얼굴 위에 예쁜 여자아이의 가면을 쓰고 있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본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가면을 대표 가면으로 쓰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못생기고 뚱뚱한데다 여드름이 잔뜩 난 안경잡이 남자 아이가 꽃미남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면 주위로부터 폭력에 가까운 놀림과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운이 없어서 평범하게 태어나거나, 자신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혹은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 본인과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을 거다. 위 소설에서 묘사한 철봉에서 떨어진 주인공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 나오는 '요조'다. 스스로가 인간실격이라고 생각하는 요조는 '익살의 가면' 뒤에 숨는다. 반 친구들을 대할 때는 방귀를 끼거나 과장되게 넘어지며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든다. 하지만 익살의 가면 뒤에는 타인에 대한 불안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으로 공포를 느끼는 반반한 도련님이 있을 뿐이다. 어느날 반 친구들을 웃겨주려는 생각에 철봉을 하다 과장되게 넘어지는 요조, 그런 요조에게 반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고 모자랗게 보이던 한 녀석이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너 일부로 넘어진거지?"
2.
운이 좋아서 내가 장동건으로 태어났다면 장동건에 맞는 가면을 쓰고 살아왔겠지만 나는 운이 좋지 않아 지금의 나로 태어났다. 가면을 의식하기 전(자아가 형성되기 전, 혹은 메타인지가 생기기 전)에 어느정도 성격이 형성됐고, 그 이후로는 스스로에게 가장 편한 가면을 쓰고 살았다. 재미있는 것은 나라는 본질의 일부에서 출발한 가면은 가면에 맞는 역할극을 하는 사이 어느새 나라는 본질을 덮어버릴 만큼 커져버렸다. 물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고 내가 초래한 측면도 있다.
어쨌든 나는 삼십대 중반에 접어든 현재까지 나름 일관된 가면을 써왔다. 일반적인 소셜 상황에서라면 분위기를 띄우는 가벼운 개그 캐릭터가 기본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여자 얘기를 입에 달고 사는 찌질하고 없어 보이는 뭐 그렇고 그런 캐릭터였다. 지금에 와서는 '왜 하필이면 이따위 가면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20대까지만 해도 나는 요조와 달리 내 가면이 나름 '굉장히 재미있다'고 정말로 믿었다. 물론 그 와중에 속으로는 남들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아집덩어리에 위선을 행하는 자존감 낮은 못난놈이었지만.
그리고 최근에 깨달은 사실인데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한 내 가면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 절반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측면이 절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생존'을 위해 직감적으로 어떤 가면이 필요하단걸 깨달았다. 그리고 내게 걸맞는 가면은 장동건은 아니고, 그렇다고 내 본질이 많이 반영된 가면은 안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자기애가 낮은 인간일수록 자기와는 동떨어진 가면을 택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는 경향이 크다. 그리고 나는 우승꽝스러운 분위기 메이커라는 가면을 택해 20년이 넘게 꾸준하게 그에 맞는 역할극을 수행해 왔다. 자의에 의한 선택이라고 믿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그다지 좋은 수는 아니었다는 걸, 어쩌면 굉장한 악수였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러니까 약 2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 때문이다.
3.
대학생 시절에도 인연이 별로 없었던 미팅이란 것을 나는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인 30대가 넘어서 자주했었다. 어쩌다가 조직된 그룹 3~4명이서 돌아가며 한 명씩 미팅을 주선해 3:3이나 4:4로 단체 미팅을 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미팅의 주선자가 내가 됐었고 그에 맞게 나는 미팅 멤버를 소집했다. 잘생긴 놈 하나, 직장이 번듯한 놈 하나, 돈 많이 버는 놈 하나, 그리고 나. 어쨌든 상대방에 대한 예의로 선택항을 넓혀주는 게 좋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는 '분위기를 띄우는 재밌는 사람'정도의 역할을 부여했다. 당시에는 그 정도 역할의 가면이 최선이라고 정말로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한참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나는 그냥 웃기기만 하는 놈 딱 거기 까지였단 걸 알았다. 실속이란 게 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개인이 경험하는 경험의 폭이 모두 다르다 보니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걸렸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도 어느 날 미팅에서 나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한 여자아이를 보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4:4로 했던 어느 미팅자리였다. 다행히도 그 중에 1명 정도가 예뻤고, 나머지 3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나머지 3명 중에 한 명이 그러니까 여자이지만 평소의 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자리를 재미있게 해주고 장렬히 산화할거야. 어차피 커플로 성사되기는 힘들테니까."
뭐 이런 식의 마음가짐이 느껴지는 행동과 말투였다. 그런데 놀라웠던 사실은 가만히 있었다면 그냥 평범한 한 친구, 나머지 3명에 속했을 그 친구는 스스로가 스스로의 역할을 '우스꽝스러운 광대'로 격하하면서 다른 사람한테도 영향을 줬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역할의 가면을 쓰자 내 내부에서도 그 친구를 낮게 보는 이상한 시선이 생겼다. 스스로가 규정한 가면이 타인의 인식과 행동에도 영향을 줬던 것이다.
나 역시 사람들이 많이 자리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었고, 그게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내 주제에 분위기 메이커라도 해야지"라는 자조내지 비하가 깔려있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똑똑한 분위기 메이커라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상황과 분위기를 돌릴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망가뜨려서 웃음을 자아내는 슬랩스틱 코미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옛 어른의 말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에 담긴 깊은 의미를 성찰하게 됐다.
4.
격언은 일견 굉장히 단순하고 뻔해보이지만 그 밑바닥까지 자세히 파보면 굉장히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침묵은 금이다', 라거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말이 그렇다.
가령 4:4 미팅 상황에 적용해 보자. 말이 많고 분위기를 띄우는 캐릭터는 90%이상(사실 거의 100%) 중간도 못가는 경우가 많다. 정말로 말을 재치있고 품위있게 잘해서 지구에서 1% 안에 드는 입담꾼일지라도 너무 많은 말은 너무 많은 침묵보다 대부분 힘을 못쓴다. 너무 많은 말 자체가 뭔가를 구걸하는 듯한 뉘앙스를 주고 사람을 가볍게 보이게 한다. 모두의 분위기는 재밌지만 그 사람의 개성과 캐릭터는 희석되고 단순히 말이 많고 재밌는 사람 정도로 남게 된다. 심지어 말은 많은데 재미도 없었다면 최악이다.
하지만 말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람에대해 어떤 판단을 할 수가 없다. 판단을 유보하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그러니까 말을 하지 않으면 적어도 상대에게 나를 싫어할 빌미나 구실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이란 건 참 신기해서 침묵하는 사람에게 더 눈길이 간다. 애초에 아예 쳐다보기도 꼴보기 싫을 정도가 아니라면 침묵을 유지하는 상대에게 인간적인 예우의 차원에서라도 먼저 말을 걸게 된다.
요는, 말을 많이 해서 얻을 수 있는 포인트보다 침묵을 통해 지킬 수 있는 포인트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요즘의 나는 조금은 귀찮은 것도 있고, 굳이 옛날처럼 구걸하듯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되도록 삼가고 있다. 아직 말을 삼가기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정확한 효과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말을 많이 할 때보다 에너지도 절약되고 다수가 있는 모임에서 시야도 넓어진것 같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말을 줄인 이후로 확실히 애써서 포인트를 따려고 노력하던 전과 비교해서 평균적인 스코어는 더 높아진 것 같다.
뭐 그러거나 저러거나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사이에 포인트는 모두 사라졌겠지만.
<2019년 1월 14일 페이스북에 씀. 일부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