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티 보이즈

욕망 그리고 슬픈 창녀

by 거짓말의 거짓말

영화 ‘비스티 보이즈’를 봤다. 영화의 배경은 소위 있는 집 사람들이 산다는 동네 청담, 시간은 주로 밤이다. 주인공은 폼생폼사 오늘만 사는 호스트 하정우, 청담동 지명 넘버원 호스트 윤계상. 윤계상은 같은 밤의 세계에 있는 윤진서를 만나 동거에 들어간다. 침대에서 둘은 서로가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예뻐서", "귀여워서"라고 말한다.


뭐 줄거리는 이쯤 해 두고 2008년 개봉해 대략 10년이 지난 영화임에도 재미있게 봤다. 감독은 윤종빈으로 검사외전, 군도, 베를린 등을 연출한 인물이다. 주로 선이 굵은 남성적인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 같다. 비스티 보이즈에서는 믿고 보는 배우 하정우의 '기깔나는' 양아치 연기가 백미지만 연출에 각본까지 직접 쓴 감독의 역량도 대단하다. 감독이 사전 취재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밤의 세계에 대한 현실감 있는 묘사가 몰입감을 높인다. (이 글 작성 후에 작가 소재원이 실제 호스트로 일을 하고 쓴 소설 ‘나는 텐프로였다’가 원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저 밑바닥에 있는 욕망을 끌어내 펄떡거리는 것을 눈앞에 들이대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본능적인 반작용으로 '스크린 속 세계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것'이라는 읊조림으로 도피하게 만든다면 비스티 보이즈는 보는 동안 거부감 없이 그럴듯한 현실의 모사로 받아들이는데 무리가 없었다.


어쩐지 나는 이른바 '밑바닥 인생'에 더 관심이 간다. 밝음보다 어둠에 더 끌린다. 나도 한 때는 밝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글을 주로 썼었고 그런 내용이 일반적으로 타인에게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얼마 전에는 누군가로부터 "예전에 썼던 밝은 타입의 글이 요즘 쓰는 어두운 글 보다 낫다"라는 얘기도 들었다.


나이 탓인지 내가 원래 그런 것인지 요즘은 밝은 코스프레도 조금은 귀찮다고 할까, 뭔가 좀 인위적인 것 같아서 생각을 좀 줄이고 쓰는 편이다.


글이 길어질까 봐 인용은 안 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아래에 나오는 밝음과 어두움에 대한 묘사에 대해 대체로 공감하는 편이다.


유미코는 사람을 밝은 기운과 어두운 기운을 내는 사람으로 나누는 버릇이 있다. 물론 그런 게 눈에 보이는 건 아니니까 엄격하게 구분할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유미코는 왠지 그 사람과 잠깐만 있어도 밝은 기운을 가졌는지 아니면 어두운 기운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웃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러니까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잖아, 아주 이상할 정도로 큰 소리로 웃지만 그런 사람에겐 어두운 기운이 느껴져. 사고방식이 긍정적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야. 다른 사람에게 응원을 받는 사람과 아무한테도 응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밝은 기운을 지닌 사람이란 그 사람 자체가 밝게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주위가 환해지는 거야. 그리고 반대로 어두운 기운을 지닌 사람은 사람 자체가 너무 밝아 주변이 어둡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여자는 두번 떠난다 by 요시다 슈이치 中>

역시나 나는 어두운 기운을 지닌 사람 쪽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낮의 사람이 나오는 것보다 밤의 사람이 나오는 쪽에 어쩐지 더 관심이 간다.


2010년 10월 나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봤다. '백년의 고독' 등을 쓴 마술적 사실주의의 거장 마르케스의 작품을 영화화 한 작품이다. 당시 기자 시험을 준비하던 실원들과 단체 관람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썼다.


조조로 영화 '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봤다. 개인적인 가설이지만 나는 남자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창녀에 대한 추억(memory) 혹은 환상(fantasy)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환상은 제각각이지만 그녀에 대한 추억은 대개 '슬프다'고 믿고 있다.


2012년 8월에 나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봤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썼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봤다. (공교롭게도 최근 본 6편의 영화 중 3편은 첫사랑, 2편은 창녀에 관한 것이다.)

가정을 잃고 알코올 중독자가 된 남자와 창녀가 라스베가스에서 만나 함께 사는, 혹은 사랑하는 이야기다. 극 중 세라가 알코올 중독자인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술을 담을 수 있는 알루미늄 병을 선물하는 장면이 압권.

이상한 소리 같이 들리겠지만(가끔 세상에 이상한 소리를 잘 지껄이는 사람의 대회 같은 게 있다면 참가하고 싶을 정도다) 영화를 보면서 찾은 명제 하나는


"창녀에게 돈을 주고, 함께 자지 않으며 창녀는 그냥 여자가 된다."이다.

나는 성매매에 대해 특별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흔히 정치적 공세에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양자택일의 질문을 하는 것이다. 가령 '북한은 적입니까?'나 '경제발전과 복지 무엇이 더 중합니까?' 혹은 '대선에 출마합니까?'와 같은 질문이 그렇다. 대체로 정치인들의 답은 노코멘트다. 대답하는 순간 양자택일, 진영논리의 프레임에 갇힌다. 물론 누군가가 내게 성매매가 옳으냐 그르냐라고 목에 칼을 대고 물어보면 대답할 말은 정해져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도 지금은 비밀이다. 뭐 그렇다는 거다.


대학생 시절 한 여자 선배가 네가 보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와 문제작 몇 편을 선물로 준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나서 구체적인 감상은 어렵지만 대체로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991년 출간 뒤 약 15년 정도의 시차가 있는 상태였고 대체로 나도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서는 열린 편이었지만 부담스러웠다. 당시 나는 사람의 관심을 가장 쉽게 끌 수 있는 원초적 욕망에 대해 쓰되 문맥 안에서 독자가 그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역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특히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성애 묘사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책에 대해서도 평가는 갈린다. 그리고 최근 어떤 사람에게 "내가 쓴 글이나 마광수 글이나 충격의 강도는 차이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글에 있어서의 수위 조절은 신동엽 형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자신이 있던 터라.

뭐 어쨌거나 또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마지막으로 무라카미 류의 한 단편집에 나왔던 말을 인용한다.


류는 한 짤막한 글에서 SM(사디즘+마조히즘) 클럽에서 일하는 다수의 여자 친구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그 여자와 손님의 관계를 서로 치유하는 사이라고 하였다. 몸을 파는 그녀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일견 화려해 보이는 남자에게 섹스를 제공하여 일용할 양식을 얻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치유해 가는 것이라고. 남자 또한 익명성의 섹스에서 심리적인 평안을 얻는 것이다.

<무라카미 류 단편집 역자의 말 中>


비스티 보이즈는 몸을 파는 여성과 몸을 파는 남성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직업이다. 그렇지만 몸을 상품으로 판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까지 거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출발부터 불공평한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한 쪽의 마음은 다른 누군가에게 돈벌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진심에 가격표를 붙이는 그 누군가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진심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인 관계란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