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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e Y May 11. 2023

비움

노파의글쓰기 강의 2차시 :: 어제의 소소한 변화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면 고된 일상을 마치고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긴 듯 아늑해지지만 곧 익숙한 공기에 스며들 때 즈음 집안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도 나와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상하게도 여행에서는 단출한 보장, 최소한의 생활 용품만으로도 부족함 없이 몇 날 며칠을 잘 살 수 있다. 그건 진짜가 아니라 잠시 삶에서 벗어난 형태여서인 건가.


옷장에 잠들어 있는 모든 짐을 꺼내 시중 가장 큰 쓰레기봉투 75L에 꾹꾹 눌러 담았다. 75L 한 장이면 충분하겠지 싶었으나 세 장하고도 더해 옷무덤을 이룰 정도로 넘쳐나게 버렸다. 전부 쓸모가 없거나 어딘가 흠이 있다거나 수명이 다했다거나 한 물건이 아니다. 사계절을 보내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 아니 입을 수 조차 없었던 옷들, 한 번도 덮으려 시도하지 않았던 이불들, 구석 한편에서 아이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장난감들... 하나 같이 먼지 쌓여가고 있었던 물건이다. 너무 멀쩡한 데다 특히 겨울 코트, 원피스는 결혼 전 소중히 입었던 값비싼 것들이라 버리기 전 다시금 눈길이 머물렀지만 눈을 질끈 감고 몽땅 쓰레기장 행으로 보내 버렸다.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비우고 서랍의 옷가지를 새로 바꾸는데도 작은 집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 한가득이다. 실은 우리 집이 짊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우리 부부가 함께 짊어진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대궐 같은 집에 살면 옷에게도 장난감에게도 이불에게도 하나씩 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으련만. 나의 능력이 아직 여기 까지기에, 그래서 너희들을 놓아주어야 하기에 미안함과 속상함이 밀려온다. 


올해도 가득 비웠다. 그런데 왜 여전히 집은 그대로 인지. 어쩌면 집을 채웠던 짐이 아니라 내 마음 속 케케묵은 먼지를 비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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