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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잠시, 멈추어도 될까요>를 퇴고했습니다.

by 인생정원사


아플 고(苦), 이야기 담(談).
잠이 오지 않는 밤, 혹은 잘 수가 없는 밤에 쓴 글들. 이곳에서는 엄마도, 정원사도 아닌 오롯이 나를 기록합니다. 일기보다 투명하고, 편지보다 깊은, 푸른 물의 아픈 시간, 그 기록을 다시 불러와 브런치북 <새벽고담>에 담았습니다. 새벽의 글들을 다듬어 다시 올린다면, 고통도 조금은 무뎌질 수 있을까요.


1.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숨을 쉴 수 없었다. 팽팽한 긴장은 고무줄로 만든 그물과 같았다. 옛 충격의 작은 반복에도 출렁이고 흔들리고 때로는 뚝ㅡ끊어졌다. 공황과 번아웃 사이에 나는 서 있었다. 모른 척하기 위해 ‘최선의 답’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촘촘하게 이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피곤할 정도로 하루를 움직이면 괜찮을 줄 알았다. 공허함을 충실히 채우는 하루였다. 솔직히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제까짓 거 없어질 것만 같았다. 열심히 쓰고, 아이도 안정돼서 '난 괜찮았다.'


얼마 전, 아이와 나의 정기진료가 겹친 날이었다.

"전 괜찮아진 거 같아요! 이제 지낼만해요. 좋아요."

"오전에 괜찮다더니, 아이랑 있을 때 여전히 고되 보여요."

바뀐 것은 많이 없었다. 괜찮다고 믿었다. 그냥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었다. 없어지지는 않았다. 가끔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 그래도 견딜만했다. 이 고통과 동거한다는 것이.


2. <잠시, 멈추어도 될까요>를 퇴고했습니다. (2025. 5. 26)


노력하는 것, 잠시 멈추어도 될까요.

나를 찾는 것, 조금 숨겨둬도 될까요.

무엇을 위해 이리 밤을 지새우나.

무엇을 위해 아픈 심장을 움켜쥐고 애를 쓰나.


고단하고 질긴 아픔 끝에 난 살아남았다. 비명처럼 번아웃이 왔었다. 하얗게 일그러진 태양처럼 온통 세상은 희게 질렸다. 눈이 부셨다가 쓰렸다. 격렬하게 울음을 뱉다가 반년 만에 전화를 걸었다. 동아줄처럼 육친의 목소리에 기댔다.


나, 그냥 좀 쉬고 싶어.

그래도 되니. 포기하면 나을까.

너무 힘들면 주저앉아도 되나.

잠시 이 노력이란 것으로부터 유턴해,

신기루 같은 환상을 쫓아도 될까.


격렬한 울음과 통증이 동시에 올 때는 도리가 없었다. 급한 대로 서랍의 진통제와 진정제를 꺼냈다. 두 알의 약을 삼키니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적막 같은 잠이 찾아왔다. 잠은 울음조차 덮어버렸다.


아이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단잠을 잤다.

아이는 울다 지쳐 곤히 곯아떨어졌다.


실습보고서를 쓰든 혹은 퇴고를 하든 마감 날짜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매일 등교를 시키고 하교를 했고 센터를 갔다. 밥을 준비하고 반찬을 잘라줬다. 아이가 아플 때는 병원을 약을 먹이고 안아주었다. 잠든 아이를 토닥이며 낮에 난 상처에 몰래 약도 발라뒀다. 다음 날 필요한 여벌의 옷과 기저귀도 챙겨 책가방에 넣어두었다. 아침에 먹을 빵도 챙기고 화장실 물때도 닦으면 하루가 끝났다.

아이를 돌보는 것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성스러운 의무라 여겼는데, 갑자기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삶은 자질구레한 의무의 연속이었다.

뭔가 대단한 과업이란 환상이었다.


매정한 노트북을 붙잡고 있어도 도통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10여 년 전에 수월했던 논문 작업의 손끝은 무뎌졌다. 작업 단축키가 기억나지 않아 몇 배로 시간이 들었다. 익숙했던 모든 것을 다시 연습해야 했다. 생전 몰랐던 자폐아이의 육아 역시 새로이 배워야 했는데.


이제 그만.


잠시 아이 곁에 누웠다. 자정을 훌쩍 넘긴 두 시 삼십 분. 곤히 잠들다 뒤척이던 아이가 등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새근새근 깊이 잠든 숨소리는 나를 아프게 하면서도 살아가게 했다. 충분히 <엄마>를 만족스럽게 안지 못한 작은 욕심쟁이는 탈진하듯 곤히 잠들었다.


너를 잊지 않으면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어쩜 이렇게 지난할까.




이렇게 애쓰는 게 의미 있을까 싶었다. 모든 걸 멈추고 싶은 새벽, 끝을 맺고 조금만, 쉬는 것을 원했다. 터져 나오는 통증과 못나진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그저 시도한 것에 의미를 둘지 모르는 나의 여정일 뿐인데. 이렇게 모두를 힘들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저 끝을 맺을 수 있다는 것, 휴학하지 않고 이사부터 실습까지 이 모든 것을 기어코 졸업까지 마쳤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완료한 것 마저 자기만족인 것만 같았다.


책임도 노력도 결국 놓지 못했다.

잠시 멈추었으나, 그만둘 수 없었다.

타고 남은 재 안에는 여전히 불씨가 있었다.

태워서 녹아 흐르는 촛불의 삶도 살아가는 방식이겠지.



이미지는 핀터레스트에서 가져왔습니다.


3. 후일담


지난봄은 수술과 실습, 졸업학기로 바쁘게 지냈습니다. 졸업하면 쉬울 줄 알았는데 공모전 퇴고라는 여정 위에 있습니다. 아이의 대한 책임을 매일매일 해내면서 무엇인가를 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실습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 퇴고과정은 조금 수월하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만 선택해서 최선을 다하고 무리하기 전에 멈추었다 다시 이어가고 있습니다. 통증도 여전했지만, 함께 살아가면서 조절하는 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저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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