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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노랑, 노랑

음악과 함께 들어보세요

by 인생정원사


퇴고막바지에요.
안타깝게 썼다가 뺀 글을 여기에 넣었어요.
새벽의 시간이 아닐때는, 열심히 살아갑니다.
이 글은 낮 시간의 저 입니다.
노랑은 요가, 혼밥, 수채화지만,
그 안에는 정원과 노래, 그리고 아이가 있지요.
여러분의 노랑은 어디에 있나요?



배앓이에 보채던 정원이를 겨우 재운다.

내가 흔들리거나 욕심을 낼 때마다 아이가 아픈 것 같다.

지금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순간, 가진 것마저 앗아간다.

진득히 몸을 휘감는 통증이 익숙하다.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지새운다.

커튼 틈으로 스며든 달빛이 캄캄한 천장에 모호한 무늬를 그린다.


욕심내도 정말 괜찮은 건지 묻는다.

대답 없는 방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아이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날이 밝았다.


https://youtu.be/vXSObLlk70U?si=qy9zZ9qRsJeZFLEH


간밤의 짙은 구름은 자취를 감추고 햇살은 황금빛으로 방 안을 채운다.

오늘은 나를 돌보기로 약속한 날.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라디오를 트니 샹송이 흘러나온다.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의 〈Padam Padam(빠담 빠담)〉. 낯선 프랑스어의 매력적인 목소리.

내가 좋아하는 가수다. 그녀의 삶을 다뤘던 영화 제목이 무엇이었더라.

나른하면서도 슬픈 눈빛. 어제의 죄책감을 묻어둔 채 기지개를 켠다.

살그머니 옷장을 열어 요가복을 꺼낸다. 레몬빛을 입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홉 살 정원이를 업을 때면 손목과 발목, 어깨의 근육과 뼈가 욱신거린다.

관절은 유연하다 못해 흐느적거리고 제대로 지지하지 못한다.

마치 바다를 유영하는 연체동물 같은 몸.

그런 탓인지 지난 몇 년 아이를 업고 깊은 바다를 건너는 느낌이었다. 물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힘겹게 물살을 가르듯 하루를 건넜다.

문어도 꿈은 있을 텐데, 내 꿈은 어디쯤일까.


요가를 시작했다. 주말 오전, 아이를 맡기고 가는 문화센터 요가.

밝은 갈색 마루의 스튜디오 안이 주말 오전의 나른한 빛으로 채워진다.


탁 트인 창이 좋았다. 강물은 멀리 반짝이듯 아른거리며 흐른다.

몸이 아프면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은 줄어든다. 해야만 하는 일들은 늘 켜켜이 쌓여 있다.

애써 처리하고 나면 녹초가 된다. 체력을 올려야 하지만 시간이 없다.

움직이면 나아질 텐데.


처음으로 선택한 나만을 위한 움직임. 오랜만에 나를 만나러 가니 두근거린다.

몸을 움직이면서 나를 바라본다. 손등은 햇볕에 그을리고 거뭇한 흉터가 팔까지 이어진다.

최근 아이에게 긁힌 붉은 상처가 도드라진다. 처음에는 선생님도 아토피 자국이냐 물으셨다.

땀방울이 까만 요가 매트 위로 툭 떨어진다. 가지런히 모은 맨발이 창백하다.

사계절 내내 운동화만 신어서 그렇다.


다시 거울의 나를 본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움직임을 잠시 멈출 때 손끝에서 활기가 돈다.

분홍빛 손끝이 작은 꽃처럼 피어오른다.

마지막에는 늘 ‘사바사나’를 하면서 눕는다.

파도 위에 있듯 몸이 부유한다.

눈을 감으면 잠을 잔 듯 개운하다.

겨우 만든 나만을 위한 시간에 나는 아기처럼 웅크리고 ‘쉼’을 청한다.


깊은 숨을 뱉으며.





https://youtu.be/rzeLynj1GYM?si=-RQXRfat31zY4-7t



아, 배고프다.

문득 태국식 볶음밥이 먹고 싶어진다.

노란 밥알이 꽃 모양 같을 거야.


아래층 식당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온다. 개나리빛 강황으로 볶은 밥.

정원이 어릴 적에 살던 동네는 놀이터를 빙 둘러 개나리가 잔뜩 피었었다.

불쑥 떠오른 생각에 배는 더 고프다. 늘 대충 때우다가 요가하는 주말은 꼭 ‘혼밥’을 한다.

오로지 나를 위해 먹는 시간은 일주일에 단 한 끼. 결혼한 이후 식사를 즐겨 본 지 오래다.

입으로는 음식을 대충 넣으면서, 눈으로는 스마트폰을 보거나 다음 일정을 확인하기 일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혼자 밥을 먹기로 했다. 숨이 트였다.

아줌마가 되니 데이트보다 좋은 게 혼밥이라니. 아가씨 때는 약속도 잡지 않고 식당에 갔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을 골라서. 선택을 그리 고민하는 법도 없었다.


툭―파란 무늬 접시가 식탁에 놓인다. 이제 맛을 음미할 시간.

보던 책도 스마트폰 속의 카톡 대화도 접어둔다. 30분 정도 눈앞에 있는 음식의 맛을 음미해 본다.


탱글탱글한 밥알의 씹힘, 깊게 우러난 국물의 따뜻함, 푹 익혀진 채소의 달큰함, 시원하고 아삭한 깍두기의 맛까지. 한 입 한 입 나를 위한 식사가 끝나면 배도 든든하고 마음의 평화도 넉넉히 채워진다.


식당의 스피커에서 아침에 들었던 가수의 노래가 또 흘러나온다.

익숙한 〈La Vie en Rose(라 비 앙 로즈, ‘장밋빛 인생’)〉.

배 속이 채워지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노랑 장미꽃잎처럼.





https://youtu.be/rzy2wZSg5ZM?si=DTM4GOMqSK8_6DN0



집으로 돌아오는 길. 종일 귓가에 맴돌았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찾아 튼다.

차 속에서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난 후회하지 않아요)〉의 멜로디가

간밤에 꾸었던 꿈처럼 모호하게 흐른다. 언젠가 보았던 영화 〈인셉션〉에서처럼.

정원이를 돌보면서 무엇인가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잠을 줄이거나 쉬는 시간을 쪼개야 만들어진다.

무력감에 누워서 쉬기만 하면 물에 잠기는 느낌이다. 더 무엇인가를 하려면 고단해진다.

몸이 아플 때는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 쉬어야 아이를 돌볼 힘이 나니 말이다.


“정원이 보려면 등교시키고 쉬어야 낫지 않아요? 체력이 좋은가 봐요.”

“아휴, 골골 100세라서 그냥저냥 다녀요. 수채화 추첨이 마침 됐는데 아깝잖아요. 한 달에 만 원이니 저렴하기도 하구요.”


나는 고단한 것이 무력한 것보다 낫다.


2년 전, 평생학습센터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매번 정원이를 센터에만 다니다 보니 나를 위한 시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목요일 오전에 아이를 등교시키고 나서 그림을 그리러 갔다.

처음에는 내가 사는 동네의 길을 그렸고, 나중에는 내가 키우는 꽃을 그렸다.


팔레트에 레몬 옐로를 짠다. 카드뮴 옐로와 옐로 오커. 물을 좀 더 섞으면 투명한 봄빛이 된다.

환하고 밝은 노랑 물감을 붓에 묻혀 종이에 칠하면 내 마음도 밝아졌다.

선명한 노랑 물감이 툭 종이 위에 떨어질 때, 눈물이 났다.

흑백 사진 같던 삶에 선명한 노랑을 새겼다.


툭 떨어진 물방울처럼 문득 정원이를 그리고 싶었다.

두 돌 시절 정원이는 작은 요정 같은 모자를 쓰고 노랑 패딩을 입고 있다.

아이의 그림을 연이어 그렸다. 여기서도 정원이는 내 곁에 있다.


사진을 고르다 정원이와 나란히 숲놀이터 간 날의 사진을 보았다.

짧은 곱슬머리가 덮인 이마에 햇살이 얹어져 있다.

정원이와 같은 노랑 패딩을 입고 있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누군가 아이만 찾지 말고 자신을 그려 보란다.


자화상을 그렸다.

그림 속 내 머리 위에도 햇빛은 반짝인다. 선생님의 칭찬.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느낌이라 기뻤다.


아, 나만의 세계가 생긴 느낌.

그 노랑 물감이 나를 돌보는 시작점이다.

한 줄기 빛으로 쭉 이어진 나만의 길.


저녁이다.

오늘 하루는 제법 밝네.


하루가 평안히 흐르면 가끔 이를 누려도 될까 싶어 그 순간의 감각이 낯설다.


정원아, 저녁엔 마당으로 나가자. 거실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가니 산수유나무가 보인다.

가지 끝에 노란 구름 같은 꽃이 매달려 있다. 산수유는 저녁노을에 살구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제 완연한 봄. 기억 속의 개나리처럼 지금도 내 곁에는 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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