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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꿈, 0의 자리

choice, cut, continue

by 인생정원사

지금은 아주 희미해졌지만 2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시절을 뻔뻔스럽게 되짚어보면 나는 제법 빛났었다. 대학원 1-2년 사이의 석사동기들은 입학순서대로 A, B, C, D, E, F, G, H가 있었다. 남자 셋, 여자 넷. B(남)와 C(여)는 같은 학기에 입학, D(남)가 그다음, E(여), F(여)가 입학, 마지막으로 G(남)와 H(여)가 왔다. 그중 C와 E, G는 동갑이었고, 이중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B, D, C, G로 C만 혼자 여자였다.

이십 대 후반의 청춘남녀가 다 그렇듯 마치 시트콤처럼 A와 B는 결혼했고 B의 미국 유학길에 A는 따라갔다. B는 작년 국립대 교수가 됐다. D와 E도 결혼했고, 최근 D는 오랜 강사생활 끝에 지방연구원에 취직했다. G는 국립대에서 시간강사로 강의 중이었다. 그리고 C는 주부다.

그렇다. 내가 C다.


1. Cut

G는 같은 지도교수님이고 동갑내기였던 그가 강의하러 내려왔을 때 점심시간을 내어 두어 번 만났다. 세월은 흘렀고 두 아이의 아빠인 그의 어깨는 가장의 무게가 더해져 있었다. 강의를 하는 친구를 내가 부러워했을 때,

“네가 더 안정적이지.”

그가 비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배우자였다. 일하지 않은 내 선택은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자폐 아이’ 엄마이자 남편의 아내였고 고가의 재활치료를 하면서도 열심히 저축해 집까지 장만했으니 그는 나의 삶을 부러워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D와 G 둘 다 C가 사는 도시의 대학/연구원으로 왔다. 그것도 엎어지면 코 닿을 20분 거리였다. 나의 고향, 내 영역으로.

그들의 지난 역사를 난 잘 모른다. 열심히 살아오고 고군분투하는 하루하루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이 아주 오래전 아이를 낳기 전 꿈꾸던 삶이란 것이 조금 씁쓸할 뿐이었다. 여담이지만, B가 간 학교에 나도 10년 전 시간강사 자리를 제안받았었다. 신혼시절, 아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먼 거리라서 포기했었다. 돌이켜보면 갈 걸 그랬나 싶기도. 그랬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한번 떠오르면 괴로워졌다. 껄끄러운 무엇인가를 삼키고 난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내가 선택한 자리는 아이 곁이었다. 나는 교수님에게도 잊혀진 사라진 유령 같은 존재였다. 정말 빛났던 것일까? 지나간 이십 대 시절이 거짓말 같았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며 감안하더라도 결혼은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9년간 아이를 사랑했고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 아이를 위한 재활공부를 했고, 스스로를 위한 글을 썼다. 엄마로서의 삶을 탓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현재 일하는 그 시절 여학우는 F와 H지만, 한 명은 혼자 키우고, 한 명은 미혼이다. 현명한 H라 말하지 못했을 뿐.


2. Choice

지금의 나는 C가 아닌 ‘정원이’의 엄마가 되어 대학원 때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다. 대학원 동기들의 소식은 거의 끊기고 가끔 저런 대단한 소식만 건너 건너 안부차 들려왔다. 스무 살 시절의 옛 친구들을 가끔 만나면 너는 어쩌면 지금도 그 시절의 열정을 갖고 사냐고 물었다.

그중 하나가 Z다. 그 역시 대학교수로 열심히 살고 있다. 나랑 비슷하게 살아와서 연애보단 서로의 생존을 전하는 25년 지기 베스트프렌드. ‘서로 연구실에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나는 지키지 못했다. 그의 결혼에 대한 선택의 이면은 나랑 비슷했다. 그의 연상의 아내는 교수였다. 빛나고 안정적인 삶은 우리가 깊이 원했던 것이었다. 대학원 동기와 달리 그의 선택은 내 상실을 자극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종의 거울이었다. 같은 결핍을 가진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나도 그도 결국 안정적인 삶이란 없다는 것을 각자의 자리에서 깨달았다. 삶은 싸워내고, 견뎌내며, 지키는 것의 연속이었다. 사랑? 가정? 자식? 무엇을 지키는지는 각자의 몫이었다.

대학원 동기들의 소식을 듣노라면 지난날의 ‘상실’이 마치 할로윈의 유령 가면처럼 이따금 불쑥 튀어나와 버린다. 유령은 보이지 않게 마음을 휘저었다. 아무리 지금 최선을 다했더라도 지금의 삶이 초라해 보이게 만드는 유령의 꿈. 경력단절이란 이렇듯 조금 잔인했다. ‘전생’이란 농담 안에 묻어두고 살아도 쉽지는 않았다.


3. Continue

40대가 되어 처음부터 쌓는 것은 쉽지 않았다. 리스크를 알고 선택을 했고, 한계를 인식하여 목표를 정했다. 0의 자리는 그렇게 더 이상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 들면서 만들어졌다.

0이란, 모든 것을 비워낸 공간이니 채우면 될 일이다.



출처: 핀터레스트
아플 고(苦), 이야기 담(談).
잠이 오지 않는 밤, 혹은 잘 수가 없는 밤에 쓴 글들. 이곳에서는 엄마도, 정원사도 아닌 오롯이 나를 기록합니다. 일기보다 투명하고, 편지보다 깊은, 푸른 물의 아픈 시간, 그 기록을 다시 불러와 브런치북 <새벽고담>에 담았습니다. 새벽의 글들을 다듬어 다시 올린다면, 고통도 조금은 무뎌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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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