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과를 갔는데 묵주를 받았다
이번 주부터 고마운 대화에 대해서 퇴고해보려고 합니다. 삶의 길모퉁이에서 귀인처럼 저에게 대화를 건넨 분들입니다. 그분들과의 짧은 대화를 스스로를 위해 기억하고자 합니다. 인생은 주고받는 연결, 그 순간이 있기에 의미가 있거든요. 낯선 타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언젠가 저도 그 다정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지난해 가을. 한 달에 한번 여드름약을 받으러 간 길이었다. 봄부터 얼굴이 온통 뒤집어져서 보는 사람마다 볼에 잔뜩 뒤덮인 여드름을 걱정했다.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며. 반년째 진료를 이어갔지만 여드름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한달에 한번, 독한 약을 한아름 받으러 갔다. 독한 약이라 그런지 속이 늘 불편했다. 의사 선생님은 반백의 작은 체구의 남자분이었는데 활력이 넘치셨다. 이 병원은 대표원장님이 출근하는 날만 사람이 북적였다. 시술이 아닌 자잘한 피부과 진료를 정성껏 해주는 분이 드물기도 했기에 할아버지들도 젊은 총각도 사춘기 아이까지 대기시간이 1-2시간씩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진료실에 들어가니 하얀 머리칼의 의사 선생님이 언제나처럼 일어나 맞이하셨다. 씩 웃으며 내게 물었다.
"아직 많이 울어요?"
"이제 괜찮아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달 전 난 진료실에서 울었다.
겨우 세 번째 진료에서 눈물을 흘렸단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더운 8월의 여름 정원이와 함께 땀 흘리면서 놀다가 낭종이 생겼다. 겨드랑이가 갑자기 아팠다. 피부과 약을 타러 간 김에 물었더니 표피낭종이란다. 낭종은 피부 안 깊숙이 박혀 있었다. 진료실 옆 작은 수술방. 시술 시간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조용한 침묵을 견디기 힘드셨는지 처음으로 개인적인 질문을 하셨다. 아마도 침묵을 메꾸기 위한 스몰토크였으리라.
"직업이 뭐예요?
"아, 그냥 주분데요."
"말씀하시는게 일이 있을 거 같아서요."
"아, 아이가 조금 손이 많이 가는 아이라 학위 마치고 집에서 뒷바라지하고 있어요."
"원래는 무슨 일을 했나요?"
"연구원 다녔어요..."
"그렇죠, 제가 사람을 많이 만나는데 어디서 꼭 일하는 사람 같아서요. 혹시 종교 있나요?"
"아뇨."
"손 많이 가는 아이... 발달장애인가요?"
"네..."
"제가 20년 넘게 수요일마다 봉사를 가거든요. 많이 만나요. 늘 나누면서 살려고 해요."
"대단하셔요."
"뭘요, 엄마도 자신의 위한 삶을 사셔요. 아이는 나름 행복할 겁니다. “
아주 고요히 눈물이 흘렀다. 겨드랑이 안 쪽 깊숙이 맺혀 있던 염증은 떼어내는 과정이 아프고 시렸다. 여태 다들 아이 생각해서 참으라 했었지. '대단한 엄마 ‘란 인정보다 내려두고 ’자신을 위해 살라는' 말에서 눈물이 흘렀다. 흐느끼지도 않고 눈물은 조용히 흘렀다. 많이 보시고 많이 봉사해 본 분, 실천하는 사람의 말은 힘이 있었다. 그래서 더 와닿았나 보다. 감사했다.
"... 아이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좋은 사람으로 된 거 같아요. 감사해요.“
"... 좋은 사람이요."
‘네, 전에는 그냥 살았거든요. 노력하지도 애쓰지도 않고. 흐르듯 불투명하게 살았어요. 아이는 제 삶을 명료하게 해 줬어요.’
그 말이 의사 선생님의 마음을 두드렸나 보다. 그 뒤로도 두 번의 진료를 더 보았다. 진료 때마다 덕담을 해주셨다. 여행 가서 다쳤던 이야기, 그리고 친구분 자녀가 발달장애였단 이야기, 성당에서 기도하면서 운 이야기. 이미 수술 때 한바탕 울었던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그 이야기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날이 세워지지 않았다. 10월 진료도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하시다 손목에 있던 묵주를 빼서 주셨다. 아.
나에게 종교란 오랜 우울에 의해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도 마음에 파문이 인 적이 없었다. 왜, 그때 받은 의사 선생님의 묵주가 나의 마음을 두드렸을까. 그 울림은 그건 그 사람이 내 삶의 일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20년을 한결같이 봉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실천하는 삶이란 녹록하지 않았다.
"미래에 좋은 곳에 맡기고 엄마의 삶을 살라"며 건네준 묵주.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리라. 삶의 위로는 정말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정원이 키우느라 피부과를 내내 안 다니다가 결혼식 이후 10년 만에 간 이유는 이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아이 키우는 내내 선크림조차 바르지 않고 뿔테 안경을 쓰고 지내서 여름이 지나면 안경자국대로 피부가 타곤 했다. 그러다가 얼굴과 목 전체에 여드름과 낭종이 뒤덮어서 도저히 감당이 안된 너덜너덜(?)한 얼굴로 방문했었다.
얼굴의 여드름은 아직 남았지만, 마음의 고름은 조금 줄어든 느낌이었다. 필요한 순간, 필요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마음이 조금 열렸다.
드디어 성당에 갈 마음이 생겼다. 작업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 꼭 가야겠다. 사는 게 바빠 마음은 먹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책을 쓰고 아이는 전학을 하고 모든 일정이 끝난 뒤 나는 아팠다.
모든 것을 스스로 헤쳐 나왔었다. 피부과 진료는 종료됐지만, 책이 나오면 한 권 들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방문할 계획이다. 종일 통증으로 괴롭고 아팠던 11월. 유난히 더 아픈 오늘 밤, 결국 난 기도를 했다. 이 순간, 묵주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 인간이란 참 약한 존재였다.
아프지 않고 싶습니다.
충만하게 제 소명을 다하고 싶어요.
옳지 않은 마음을 먹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아이 곁을 오래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그 사이에 글만 쓸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더는... 무모한 욕심을 안 부릴게요.
스스로를 잘 돌보겠습니다.
중추신경계 진통제를 먹어도 가시지 않는
이 아픔을 멈출 수 있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