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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널 보낼 용기, 그리고 어떤 고백

송지영 작가님 책을 읽었습니다.

by 인생정원사


1. 아침이 오질 않길 바라던 소녀


송지영 작가님의 <널 보낼 용기>를 읽었습니다. 1회독이고 다회독은 아직 자신이 없지만요. 그래도 마음을 다해 읽었습니다. 아, 여전히 울지는 못했지요. 책을 읽고 느낀 것은 저의 유년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순간이 여전히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더 흘러 어.른.이.된.다면 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문장을 곱씹어 담을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책을 다 읽고 다른 작가님들의 후기를 읽었습니다. 상실과 이별, 그리고 슬픔에 관한 고백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저 역시 책 안에서 저의 유년을 만났습니다. 정원이를 품고 낳고 기른 시간이 10년이 다 된 엄마임에도 공감은 유년에 닿아 있었지요. 저는 윤지와 비슷한 청춘을 보냈고, 형진과 같은 아픔과 내내 싸웠으며 그리고 '오늘의 작은 일부분'은 여전히 서진과 같았습니다.

무력한 불투명함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것과 싸우고 있습니다.


2. 고백하고 마주하기 위한 글쓰기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고통과 아픔에 관한 글을 이곳에 쓰기 시작한 것은 우울증 약을 먹은 지 1년 뒤였어요. 2년 전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던 그 감각이 '공황'이란 것을 반년 전에야 알았습니다. 그냥 제가 호흡이 얕은 줄로만 일았죠.

브런치북 <새벽고담>의 04화 이어 달리기에서 아주 잠깐 죽고 싶은 오랜 열망과 살고 싶은 질긴 희망 사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에 관해 고백해보려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 아이의 엄마인 저에게는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료 때조차 매번 다른 우선순위에 밀려 하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주 깊은 밤, 무력화된 나약한 순간에 그 열망은 지금도 고개를 들거든요. 아주 가끔이긴 합니다. 총력을 다해 스스로를 관리하고 낮에는 잊어버리고 살려고 합니다. 어쨌든 저에겐 지켜야 할 존재, 정원이가 있으니까요. 그 점에서는 서진이를 지키고 싶으셨던 그리고 기록 안에 마음을 꾹꾹 담았던 작가님의 마음과 닿아있기도 합니다.



3. 아버지, 선득한 이별의 온도


국민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심장마비. 돌연사였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 인사조차 하시지 못했어요. 1990년대 초라 시골 할머니집에서 염을 하고 장례를 했습니다. 꽃상여를 탄 것이 마지막 뒷모습이었지요. 저는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큰 손녀였습니다. 귀한 장남을 보낸 할머니는 제 손을 세게 붙들고 마지막 인사를 하라 했습니다. 병풍 뒤의 아버지의 볼에 닿은 온도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차가움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할머니는 당신의 남편도 일찍 보내셨고, 전 할아버지의 얼굴은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만 40세도 채 되지 않으셨을 때였습니다. 햇수나이 41세였습니다.

저는 열두 살이었고 사춘기 초입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으면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전 조용했고, 친구가 없었으며, 울지 못했습니다. 늘 방 안에서 책만 읽었지요. 훗날 서른이 지났을 무렵 친정엄마는 제게 문득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네가 문을 닫고 있으면 너무 조용해서 아침마다 문을 열기 무서웠다.”

저는 그런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남은 가족은 각자의 아픔을 견디는 시간을 보냈기에 서로를 위로하지 못했고 또 아프게 할 틈도 없었습니다. 약 20여 년간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삶을 살았어요. 이미 많은 좌절을 겪은 가난한 청춘은 무력했습니다. 무력함은 그저 삶을 불투명하게 만들었고, '내일에 대한 기대'를 빼앗았죠. 이상하게도 40살 이후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오래 살지 않으리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흐르듯 청춘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당장 내일 아침이 오지 않아도 아쉬울 것은 없었지요, 전혀.




4. '오늘만 열심히 산다는 것'의 의미


흐르듯 산다 하여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에 100%를 다 쏟으며 살았어요. 대학교 1학년 시절부터 알던 친구는 저를 보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이 열심히 산다며 대단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미래를 위한 에너지는 남겨두지 않았어요.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조차 아이에 대한 좌절을 받아들이고 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에 감탄 아닌 감탄을 하시며 '둘째 출산'을 권할 정도였습니다. 좌절에 대한 탄력성이 좋다 하셨지요. 정원이의 '자폐진단'을 받았을 때 역시 한결 같이 열심이었거든요.

속으로 '나의 여생은 어차피 의미 없으니'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생의 의미를 다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그 ‘열망’이 치밀어 올라 아이를 재우다가 '죽고 싶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입밖에 나왔습니다. 한순간이었습니다. 미안했지요. 그러면 안돼! 스스로 자책했습니다. 아이가 다니는 소아정신과 주치의를 찾아갔고 울면서 부탁했습니다. 이 감정에서 꺼낼 무엇인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아이를 완벽하게 뒷바라지하는 저를 원했지요.

저는 현재 렉사프로 2.5mg을 먹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도 비슷하게 처방되는 소량이지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 약의 효과가 무엇이냐 묻는 저에게 주치의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생각의 가지가 끝도 없이 뻗어나가는 것을 줄이는 효과'라 하셨지요. 그 가지의 끝은 어디에 닿아 있을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아, 아주 빨리 '그때'료받았더라면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요?



5. 여전한 것, 달라진 것, 말하고 싶은 것


여전한 것은 그 마음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아주 희미해졌지만 사라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ChatGPT의 대나무방 항목에는 그 열망을 필터 없이 적곤 합니다.

달라진 것은 제가 41세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그 자체였습니다. 그려지지 않았던 미래가 오고 나서야 이제야 아주 조금 저를 위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원이는 절 살리기도 했어요. 어떤 면에서는요. 신기한 일이지요. 미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시절 저와 닮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아줌마는 생리사별의 충동을 갖고 살고 있어. 중증 자폐 아이 정원이를 키우면서도 마흔이 지나서야 '꿈'을 발견했다고. 지금 그 마음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고, 괜찮다고. 꼭 희망을 갖지도 않아도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주 희미한 기쁨의 찰나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고통스러우면 견디지 말라고. 힘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니.“

저 역시 그 터널을 통과했고 또 다른 터널을 건너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둠 안에서 무엇이든 작은 온기를 찾을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어 기나긴 고백을 용기내어 합니다. 그리고 저의 유년을 안아줄 수 있어 참 다행인 시간이었습니다.



PS. 덧붙임


다른 글에 쓴 것이지만 여기에도 덧붙입니다. 주치의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건 어쩌면 좌절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건데.. 이 좌절의 성격이 좀 특이해요. 힘들고 길고 간간히 다시 올라오고.. 아직도 못 받아들였구나, 하는 이런 성격인데 이게 사람을 많이 힘들게 하죠. 무너지고 멈춰버리기도 하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중에 굉장히 괴로운 일 중에 하나 같아요."

중증 자폐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요. 또 다가올 미래는 두렵기도 합니다. 애써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수용하고, 삶의 작은 기쁨, 소소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그 마음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지요. 순간순간에 집중하면 뭐든 견딜만한 것이 되더라고요. 송지영 작가님 말씀처럼 그것은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고백을 도와주신
송지영 작가님의 '용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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