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빵순이의 마지막 빵 : 에필로그 추가
[안녕하세요.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어요. 종양표지자 검사에서 난소암 수치가 높게 나와서 재검을 해야 한대요]
“네?”
전화는 시속 100km로 서둘러 병원에 가는 길에 받았다.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감각한 스피드에 건조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튼 입술 사이로 피맛이 느껴졌다.
[지난번 건강검진 결과 안내 드려요. 본원에서 외래를 보고 싶으시면 내일 예약 전화가 갈 거예요. 지난번 자궁내벽 폴립 추적검진 3개월 뒤에 하시기로 하셨으니 같이 검진받으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별도로 서둘러 재검받겠습니다.“
사실 별거 아닐 수 있어. 수치가 높아도 검사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 설령 종양이어도 양성이면 돼. 악성이어도 초기면 치료받음 되지. 괜찮아. 2년 만에 한 건강검진에서 난 20kg을 감량했고, 당일 내시경 소견이 위장과 대장이 깨끗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결과가 얼마나 잘 나올지 기대를 하고 있었지 이런 결과는 상상도 못 했다.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한 해였는데, 조금 억울했다.
죽음은 순식간에 단절과 상실을 초래한다. 나도 예외일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5학년때 아버지가 돌연사로 돌아가셨다. 손끝에서 느낀 준비되지 않은 차가움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만 40세에 아버지는 우리와 영원히 이별했다. 아무런 인사조차 남길 수 없었다. 준비 없는 이별은 내가 허락할 수 없다. 절대로.
월요일. 주말에 해마다 8년째 같은 자리에서 찍는 셀프 가족사진을 오늘은 찍고 싶지 않다는 남편의 말에 두통이 밀려와 재활의학과에 들러 목에 주사 두대를 맞았다. 남편과 제대로 된 대화가 멈춘지 오래. 난 아프고, 그는 힘들다. 목은 주사 바늘이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뭉쳐 있다. 정신차리려면 카페인이 필요해.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들이켜고 주민센터에서 [발달장애인 부모상담 바우쳐]를 신청했다. 살아야 하니까. 가족을 지탱하는 건 필요해. 어떻게든 해보자, 하며 울컥하는 마음에 신청서를 썼다. 처음 보는 주민센터 직원에게 내적인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부부가 같이 상담을 받아야 할거 같아요”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패배는 아니다. 살아냄을 포기하는 것이 지는 것이다. 그 말을 평생 되뇌이고 있다. 어떻게든 가족으로 생존하고자 바우처를 신청하고 나서 살아내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가 상담하고 렉사프로(세로토닌)를 처방받는 게 오늘의 계획이었다. 반알. 이 작은 약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줄 것이다. 그 사이에 <암일 수도 있다>는 전화가 끼어들 줄은 정말 몰랐다. 애써 어깨에 짐을 지우고 힘내서 살려고 하는 순간, 죽음의 냄새를 가까이 맡은 기분이었다. 인생은 지독히도 아이러니하다. 원래 그렇다.
전화를 끊고 달려가는 차 안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귓가에 울리는 <hold on>의 신나는 멜로디 속에 경차는 달렸다. 병원 지하 주차장에 주차한 얼굴이 눈물에 젖어있다. 사실 죽는 건 무섭지 않아. 아이를 두고 가는 게 두려웠다. 아직 못 가르친 게 많았다. 삼시 세끼 밥 국 반찬만 먹는 내 새끼. 하지만 누가 그렇게 평생 해줄까. 스스로 쉽게 먹을 수 있는 걸 가르쳐야 할 텐데. 유일하게 그나마 먹는 빵이 모닝빵이랑 식빵이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씻고 옷 입고 양말 신고 전자레인지에 햇반이나 모닝빵이라도 혼자 돌려 먹을 수 있어야지.
내가 얼마나 아플지, 어떨지, 생각조차 나질 않았다. 아직 가르칠 게 너무 많은 느리고 느린 내 아이 생각만 났다. 괜찮을 거야, 아가. 엄마가 내일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줄게. 우리 함께 빵집에 빵도 사러 가보고 햇반도 돌려보고, 모닝빵에 딸기잼도 발라보자. 엄마가 하나하나 쪼개고 쪼개서 가르쳐줄게. 너무 늦지 않게 서둘러 볼게. 엄마가 네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이거 같구나.
머쓱한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하는 전화지만 12월 2일 오늘 받은 전화라 모든 것이 미정이다. 삶은 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죽음 앞에서 생각난 건 고작 네가 먹을 수 있는 빵이었다. 그래, 내일 죽는다면 오늘 가르쳐줄게. 늘 그렇듯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면서. 사랑한다. 아들아.
에필로그_
다행히도 12월 3일 전화를 받았습니다.
[골반초음파를 추가로 하셔서 재검은 안받으셔도 되요. 안하셨음 내원하셔서 재검 해야 되지만, 다행히 초음파상에 지금은 이상은 없으니 3개월 뒤 내원예약만 잡으시면 되요]
산부인과 담당 간호사의 목소리가 이리 반가울 줄은 몰랐어요. 혹시 몰라 건강검진에 추가로 해뒀던 골반초음파가 재검을 대신 했습니다. 다시 검사 받고, 기다리고, 또 결과를 듣는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비록 24시간의 마음졸임이었지만,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 기회가 되었기에, 이 또한 운명이 내게 들려주는 시그널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기회의 시간이어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재검 안해도 되니 참 다행이지요. 아, 머쓱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고독한 빵순이의 빵 이야기]는 공동매거진 '이토록 친밀한 빵'에서 연재되는 인생정원사의 이야기입니다.
1. 단팥빵, 나야 나!
Photo by 인생정원사
표지사진 출처: https://pin.it/6WN1Ne8Q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