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몰라도 들으면 다 안다는,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10대 후반~20대 정도의 나이대의 청춘들이 이 곡을 듣는다면 단번에 "디지몬!?"이라고 외칠 것 같다.
디지몬 어드벤처라는 애니메이션이 삽입된 곡인데, 디지몬 어드벤처를 자주 보며 유년 시절을 보낸 세대이기 때문인지 곡 이름보다 멜로디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라벨이 스페인 춤곡인 볼레로를 듣고 작곡한 곡이 바로 곡인데, 단순한 멜로디 두어 개가 반복되어 전개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중독성을 보여준다. 두어 번 반복해서 듣다보면 그 날 하루종일 귓가에서 맴돌게 되는 악마의 작품이므로 중요한 시험을 준비한다면 안 듣는 것을 추천한다. (특히 고3 여러분, 9월 모평도 지나갔습니다 뚜왕뚜왕)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라벨 볼레로 영상은 여기로: https://youtu.be/dZDiaRZy0Ak
서울시향이 연주한 라벨 볼레로 영상은 여기로: https://youtu.be/avhSABEy_i4
볼레로는 스페인과 그 지배를 받은 쿠바에서 유래한 춤이자 춤곡을 의미한다. 스페인 볼레로와 쿠바 볼레로는 리듬과 박자가 아예 달라 별개로 취급한다. 원조 스페인식 볼레로는 18세기 후반에 나온 것으로 추정하며, 왈츠나 마주르카에 비해 템포가 느린 편이다.
프랑스 낭만주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20세기 중순 러시아 안무가의 부탁을 받고 발레 곡를 위한 곡으로 작곡했는데, 현재는 발레보다는 연주회 레퍼토리로 많이 쓰인다. 이 작품은 술집의 탁자 위에서 무용수가 춤을 추다가, 고조되는 리듬과 춤의 역동성에 동화된 손님들도 일어서서 다함께 춤을 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곡은 뉴욕 필이나 베를린 필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도 가끔 숨 때문에 쉬어버리거나 소리가 깨지는 걸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난곡으로도 유명하다. 듣기에 굉장히 단순한 선율로 구성되어 있지만 솔로로 구성되어 차츰 쌓이는 구조이기 때문에 작은 실수를 하거나 음색이 조금만 안 좋아도 금방 티가 나버린다. 특히 스네어 드럼 솔로는 짧게는 15분 길게는 18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비슷한 리듬을 연주해야하기 때문에 연주하기가 아주 곤혹스럽다고 한다. 스네어드럼이 가장 베이스로 깔려 음악 전반의 박자와 리듬을 주도하기 때문에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실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스네어드럼이 실수하는 순간 연주회 자체를 완전히 망쳤다고 봐도 된다. 스네어드럼 소리는 작은 편이라 지휘자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지휘자 앞에 배치하곤 하는데, 실수를 방지하고자 지휘자의 감시 아래에 두기 위해 앞에 배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호른과 트롬본 솔로는 고음역 위주로 아주 매끄럽게 연주해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도 볼레로는 더럽게 어려운(...!) 곡이다.
곡의 구조와 멜로디가 아주 단순해 "단순한 재료로 최상의 효과를 구현하는 곡"의 대명사로 불리며, 훗날 미니멀리즘 사조에도 영향을 줬다.
이 곡을 작곡한 라벨은 볼레로 연주를 되도록 느리게 해달라고 주문했으나, 동시대 거장 지휘자들은 라벨의 말을 잘 안 들었다는 썰이 전해진다.
20세기 거장 토스카니니가 자신이 이끌던 뉴욕 필과 함께 연주할 때 라벨이 참관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템포가 너무 느려 연주가 끝난 후 라벨은 토스카니니에게 "너무 빠르니 더 느리게 지휘해야 한다"고 충고했는데, 토스카니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라벨도 자신보다 연배가 더 높고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지휘자와 싸우기 싫은 모양이었는지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뒀다고 한다.
현재 연주는 15~16분 대가 대세다. 라벨이 원하는 길이는 17분으로 매우 느리게 연주하라 주문했는데 토스카니니는 현재 대세보다 더 빠른 14분 대로 연주했다.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향은 14분 대로 비교적 빠른 템포로 연주했다. 위에 있는 영상은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현 대세에 맞춰 15분 대로 연주되었다. 라벨이 제시한 17분을 거의 맞춘 연주는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52년)의 연주와 샤를 뮌슈의 파리 관현악단의 연주(1968년) 뿐이다.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삽입곡으로 귀에 익숙하고 친근한 볼레로. 한 번 들으면 계속 듣게 되는 마성의 멜로디가 돋보이는 난곡 중 난곡이며,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지휘자마다 볼레로를 해석하는 방법과 느낌이 저마다 다르므로 볼레로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여러 오케스트라의 곡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빠르기가 느린 곡은 느린대로, 빠른 곡은 빠른대로 볼레로는 매력적이다.
p.s. 라벨과 관련해서 또 다른 흥미로운 썰이 하나 전해진다.
조지 거슈인(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한 작곡가 -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때문에 많이 유명하다)이 라벨에게 사사받기를 청했는데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인인데 왜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하냐?" 며 거절당했다고. 근데 라벨이 조지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분명하게 밝혀져있지 않다고 한다. 라벨이 조지를 거절한 이유가 이미 그가 충분히 훌륭한 음악가이기 때문이라는 썰도 있고, 음악성 없는 대중 음악을 파는데 자기보다 돈을 더 번다며 비꼰 것이라는 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