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 하다 보니 찾게 되는 '나'
취업 준비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이제 말할 때가 되었다.
'취뽀'했다.
광고 AE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쩐지 모르게 취뽀 했다는 성취감보다 부담감이 먼저 밀려들어온다. 앞으로 공부할 것이 산더미인데, '마케팅은 실전의 학문'이라는 모 경영학과 교수님의 격언을 믿고 나아가보려 한다. 절대 마케팅으로는 취업이 안될 줄 알고 제약업계의 품질보증 팀에서 4개월 인턴을 거쳤는데 그 끝이 마케팅이라니! 이전 글을 쭉 읽어보니 참 이것 저것 많이도 기웃거렸다. 아무렴 어때. 지금까지 결정하고, 자신있게 확신하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헤매면서 부딪히고 배운 덕이리라. 공학용 계산기를 두드리며 숫자에 매몰되었던 학부 4년이 이제 데이터로 피어나려나 싶다.
나는 '헤매면서 어지러이 찍어댄 발자국들'이 길을 만든 것임을 믿는다.
입사를 앞두면서, 그동안 '취업'을 위하여 들인 모든 공과 노력을 돌이켜보기로 했다. 서울 안에 있는 대학교를 가겠다며 수능을 한 번 더 보고, '그냥 화학 점수가 제일 잘 나오니까'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학과를 선택하고, 당연한 수순을 밟듯 PEET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휴학하고선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하고, 복학했더니 학점은 박살 나고, 갑자기 또 오케스트라에 꽂혀서 입단하고, 탈단하고, 어디서 나온 배포인지 학교 동아리를 만들고, 갑자기 밀어닥친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던져보고, 무슨 미련이 있던 것인지 갑자기 학과를 충분히 살려 취업하겠다며 제약 품질 직무 교육을 160시간이나 이수하고, 거기서 친구들을 만나며 서로의 앞날을 응원했다가, 좋은 기회로 제약 QA 인턴십을 하고, 정신 차리니 2019년 3월이다. 사냥개에게 쫓기는 토끼마냥, 28살 여름이 다가오기 전에 어서 빨리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자기소개서를 찍어내고, 내고, 거의 떨어지고, 어쩌다가 붙고, 더 어쩌다가 면접을 보고, 최초로 최종면접도 봐보더니, 입사 일이 결정되었다.
입사를 앞두고 몸과 마음을 정돈하고 있는 지금, 갑자기, '거진 10년에 걸친 이 대장정을 통해서,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느껴왔는가?'가 궁금해진다. 참 갈피 못 잡고 헤맸구나 싶은 생각이 새삼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소개서를 수 십 개를 찍어내면서, 그동안의 모든 경험이 단 하나의 회사, 단 하나의 직무를 위하여 내가 만든 '빅 픽처'였음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서, 늘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느닷없이 말이다.
입사 일자가 정해지고, 이제 이 불안한 백수 생활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여유가 아쉬워진다. 해남행 고속버스에 올라 짧은 휴가를 즐기고 왔지만 어쩐지 머릿속이 되려 더 복잡하다. '이러다 평생 잉여 인구로 의미도 가치도 없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취업 스트레스가 가장 크고 무서운 줄 알았다. 막상 입사 일자가 정해지고 입사 준비를 하다 보니, 연습 게임도 없이 바로 아레나 위로 던져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인턴을 하라는 걸까? 그러니까, 그 어떤 실수도 용인되는 그 속 편한 신분을 이용해서, 여러 방면으로 똥을 좀 싸 봐야 똥 된장을 구분할 줄 알게 되기 때문인 걸까?
아무튼, 마침내 취업한 지금,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늘 반복되던 일상이 한 차례 큰 변화를 겪게 될 터이니 싱숭생숭함은 당연할 테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취업한 백수'의 삶은 곧 저물 테다.
약 2주 간의 '취업한 백수의 철학' 끝에, 이제는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이제 한 발짝을 뗐다. 대학교가 한 발짝인 줄 알았는데, 대학교는 그냥 대학교였을 뿐이라는 것은 취업 준비를 하면서 잘 알게 되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겠다. 망상을 좋아하는 철학자에게 던질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나에게, 나의 인생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