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본점
오랜만에 우산을 들고나가야 하는 아침이었다. 10년 전에 샀지만 여전히 제 할 일을 잘해주고 있는 검둥 오리 우산을 쓰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이 시국에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집에 있던 KF94 마스크가 20장은 넘게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2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안 즉시 네이버, 쿠팡, 티몬, 위메프 등을 오가며 어떻게든 마스크를 주문하려 했으나 몇 달 전 한 장에 890원 주고 샀던 것을 도저히 5000원 주고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오프라인 구매였다.
마스크를 정가에 판매하는 가까운 오프라인 매장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국민 가게 다이소 강남본점을 목적지로 정했다. 강남역 4번 출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56분. 다이소의 오픈 시간은 10시니까 이 정도 시간이면 적당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지상에 올라와보니 다이소 강남본점 앞은 이미 오픈을 기다리는 수많은 우산들로 꽉 차 있었다. 그 우산들은 옆 건물 버거킹 앞까지 길게 이어져있었고 그 모습에 잠시 넋을 잃은 사이 기나긴 우산 줄 끝에 두 개의 우산이 더 추가되었다. 잃은 넋을 빠르게 되찾고 그 뒤로 달려가 줄을 섰다. 우산 줄은 순식간에 길어졌다.
차갑게 튀는 물방울을 맞으며 다이소의 오픈을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움직여야 빠르게 마스크를 살 수 있을까? 동선을 미리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먼저 다이소 강남본점의 유리문 입구를 왼손으로 당겨 여는 잠깐 동안 오른손에 들고 있던 오리 우산을 내려 접을 준비를 한다. 왼팔과 어깨로 유리문이 닫히지 않게 잡아두고 두 손으로 빠르게 오리 우산을 접는다. 본격적으로 다이소에 입장하면서 오리 우산을 우산 비닐에 넣는다. 이때 타이밍이 중요하다. 오리가 비닐 안에 한 번에 쏙 들어갈 수 있게끔 잘 접어줘야 한다. 급한 마음에 대충 오리를 비닐에 꽂으면 비닐이 찢어지거나 우산 끝에 비닐이 걸쳐있는 꼴이 된다. 그러면 우산에 있던 빗물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그 물에 누군가가 미끄러질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의 검둥오리를 비닐에 잘 넣어야 한다. 그러고 난 후 몇 미터 걸어 들어가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 옆에 엘리베이터도 있지만 시시각각으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엘베보다는 계단으로 가자. 2층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대여섯 걸음 들어가면 마스크 진열대가 있다. 거기까지만 문제없이 갈 수 있다면 나와 검둥오리는 오늘 외출의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어느새 10시가 되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차례대로 입장했다. 줄이 점점 짧아지고 드디어 나도 다이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예상 동선과는 달리 실제 유리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내가 집중해야 할 일은 검둥오리 비닐에 쏙 넣기, 그것도 한 번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오리가 비닐 안에 들어가는 것만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한방에 우산을 비닐에 쏙 넣고 확 당겨 빗물을 흘리지 않았다. 시작이 괜찮았다. 이미 마스크를 손에 들고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 우리는 열맞춰 2층으로 향했다. 계단에서 속도가 늦춰졌다.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계단이 몇 개인지 세는 듯 천천히 올라갔다. 이토록 다이소 2층이 간절했던 적이 있던가. 드디어 2층을 밟았다. 오른쪽 마스크 진열대 앞에 서서 박스에 들어있는 크리넥스 마스크를 한 사람에게 3장씩 주는 직원분이 계셨다. 다이소 유니폼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아 출근하자마자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일을 시작하셨거나, 혹은 유니폼을 입지 않는 직급이신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마스크 3장을 받고 U턴하여 계산대를 향해 다시 내려갔다. 또다시 계단에서 속도가 느려졌다. 너무나 귀중하고 소중한 크리넥스 KF94 마스크 3장을 품에 안고 계산을 기다렸다. 내 뒤로 10명쯤 더 마스크를 받았을까, 아까 그 직원분이 소리쳤다. "마스크 다 떨어졌어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허탕 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갔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들은 우르르 나가려는 사람들을 뚫고 2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몇몇의 사람들은 "마스크 없대요~"라고 살짝 던져주며 다이소를 뛰쳐나갔다. 허탕 친 무리 속에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온 여성도 있었다. 아이와 여성은 2층으로 올라가려 계단에 발을 디뎠다가 누군가가 던져준 말에 다시 몸을 돌려 내려가는 사람들 속으로 합류했다. 순간 내 품에 있던 귀중하고 소중한 크리넥스를 저들에게 양보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뒤이어 그러면 다른 허탕 친 사람들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저분은 그런 걸 원치 않을 수 있어.'라는 결론을 내리며 나라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생존본능에 놀람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계산대와 가까워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마스크가 얼마인지 보지도 묻지도 못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샀는데 결국 온라인이랑 같은 가격이면 어떡하지? 한 장에 3000원까지는 괜찮을 것 같은데 4000원이면 어떡하지? 초조한 마음에 다른 사람들이 계산할 때 계산대에 뜨는 가격을 봤다. 3장에 3000원. 휴- 다행이다. 부직포 같은 나의 목숨을 당분간은 적정가에 유지할 수 있겠구나.
품 안에 소중히 마스크를 안고 다이소를 나섰다. 검둥오리를 펼치면서도 마스크가 내 손에 잘 있는지, 3장이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3장이 맞았다.
검둥오리야, 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