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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Jul 10. 2024

인생은 방울토마토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온번 째

건강하지 않은 삶을 축하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축하해


속삭임에 눈이 떠졌다. 약기운에 머리가 멍하다. 몸이 시키는 대로 하루를 시작한다. 돌돌이를 들고 머리카락을 청소한다. 베개도 한번, 이불도 한번, 침대보도 한번. 덮고 있던 이불을 사각형으로 접어 베개 아래 가지런히 놓는다. 


생수 하나를 따서 마시고 남은 것은 커피 포트에 넣고 끓인다. 뜨거워진 물로 믹스커피 한잔을 타서 마시면서 잠시 테이블에 앉는다. 밖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오고 있다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양치질이라고 알람 내용이 보였다. 알람을 끄고 화장실로 가서 양치질과 세수를 한다. 


아직까지도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머리가 좀 깨어난다. 기분은 나쁘지 않다. 비에 젖을까 봐 짧은 칠부바지와 샌들을 신고 나왔다. 커다란 우산을 들고 버스를 기다리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내려서 한참을 걸어 회사에 도착했다.


까마득하게 모처럼 일찍 온 회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적막감이었구나. 매일같이 늦은 나는 이것과는 다른 적막 속에서 들어왔다. 숨 막힐 것 같은 습기로 둘러싸인 그러한 정막감.


너무나 고요하고 조용한, 평화로운 정막이 사무실 안에 가득하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읽고 그리고 오늘 할 일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둘씩. 허공에 큰 소리로 인사하는 사람, 모두에게 한 사람씩 인사하는 사람, 친한 사람에게 손을 들어 보이는 사람,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자리에 앉는 사람. 사람들이 들어올 때마다 공간은 색깔이 바뀐다. 회색에서 컬러로 다시 회색으로.


"정말 그만두겠다는 거예요?"


그 말에는 아쉬움보다는 정말 그래 줄 거야라는 느낌이 있었다. 


네 맞아요. 이제 저도 그만 쉴 때가 된 것 같아요.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사직서는 양식에 맞춰서 제출해 주세요. 인수인계는 뭐 특별히 할 게 있나요?"


특별히 할 게 없다. 최근 일 년간은 내가 뭐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연차도 남은 게 없다. 그간 무단결근, 뜬금없는 조퇴, 일상 같은 지각 등으로 오히려 공짜로 더 일을 해줘야 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나가겠다고 해서 기쁜 것인지 회사는 그런 걸 문제 삼지 않았다. 뭘 할 거냐는 관심 없는 물음에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사실 전 이제 마음을 모을 거예요. 갈가리 찢어져서 어디론가 흩어진 마음들 말이죠. 터널 구석구석 뿌려가며 지나왔는데 이젠 다시 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드디어 이 긴 터널을 나왔다. 애당초 있지도 않은 동굴 속 세상. 나는 동굴 속을 계속 걸어서 언젠간 거길 나와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동굴의 끝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우리 인생은 동굴이 아니다. 터널도 아니다. 그냥 세상일 뿐이다. 어두운 곳도 있고 밝은 곳도 있다. 마늘만 먹는다고 사람이 돼서 동굴밖으로 나오는 곳은 아니다. 애당초 동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단한 순간들이 이어져 하나의 공간이 되지 않는다. 시간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걸어 나올 곳도 다시 들어갈 곳도. 시간이 지나면 끝이 올뿐이다. 


"언제 한번 식사 같이 해요. 좋아하는 게 뭐예요?"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게 뭐야? 어릴 때는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선명했고 인생이 길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이에 뭐가 좋아라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그래 뭐가 맛있었을까 몇십 년 의 기억을 되살려야 되는 걸까 아니면 일주일 안에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되는 걸까. 


이런 흐릿함이 이제 나의 세계이다. 벗어나야 할 동굴 같은 것은 없으며 이미 나는 세상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선명함에서 흐릿함으로 시간은 계속 흐르고 그 끝으로 갈수록 밝은 세상이 된다기보다는 어둠으로 갈 가능성이 많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욱더 흐릿함에 대해 인정해야 된다. 발버둥 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더 이상 선명해지지 않는다. 동굴처럼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점점 흐릿해진다고 반드시 어두운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터널이 아니므로 벗어나기 위해 긴 인내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과정이지 지난함을 참고 견디어 얻어내는 결과가 아니다. 난 곰이 아니다.


별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팀장의 얼굴을 뒤로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사람들의 부산한 소리가 들려온다. 밥 한 번을 외친 사람도 아닌 사람도 한 사람씩 없어지고 사무실에는 나 혼자 남아있다


가방에서 방울토마토와 식빵 한 조각을 꺼냈다. 과일은 사과를 좋아했는데 어느틈엔가 방울토마토가 좋아졌다. 씻어서 냉장실에 넣어 놓고 몇 개씩 꺼내서 먹기만 하면 된다. 깎을 필요도 없고 껍질을 벗기는 수고도 없다. 야채인지 과일인지 불분명하지만. 과일이든 야채든 분명할 필요는 없다. 방울토마토는 그냥 방울토마토라 생각하자.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 되면서도 걱정한다고 뭐 특별히 달라질 게 있나 싶다. 이런 마음은 약의 영향이 크다.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고 사력을 다해 발버둥 친다고 계획대로 되지도 않았다. 


방울토마토 몇 개와 빵 한 조각만 먹었는데 속이 든든하다. 늦게나마 아침약을 먹는다. 어제는 비가 와서 늦게 잤다. 그래서 자기 전에 먹는 약을 새벽에 먹었고 아침약도 늦게 먹게 되었다. 먹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밖에는 아침부터 내린 비가 여전히 그치지 않고 쏟아지고 있다. 빌딩들이 흐릿하다. 난 조용히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었다. 빗소리가 모든 것을 파묻고 있다.


지난 1년간의 모든 계획이 빗소리에 묻혀 희미해지며 사라진다. 괜찮다. 그런 계획 따위 없어도 된다. 똑바른 인생, 똑바른 삶, 괜찮은 인간관계, 가족과 사랑, 약에 의존하지 않는 삶 등등. 그런 것은 망가짐과 보통 사이, 불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 난 괜찮다. 그렇게만 생각하고 살아가기로 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빗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앉아있는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무언가를 위해 지난한 노력을 해야 하는 시간이 다시 오지 않았으면, 그럼에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소멸을 받아들였으면.


이런, 나아지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편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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