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여든여섯 번째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기분이 들쑥날쑥 하다. 이유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못 올라오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기분이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는 날도 있다. 약을 먹지 않으면서 생기는 이런 제멋대로의 기분을 이제 붙잡지 않고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잡는다고 잡히지도 않고 기분이 좋을 때 보통으로 굳이 끌어내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심연으로 떨어지면 평균보다 더 떨어지는데.
오늘은 기분이 미칠 듯이 좋았다. 특별한 일 없이 휴가를 내고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거렸다. 기분이 좋은 날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은 나가서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고를 칠 수 있고 수습 못할 약속들을 남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을 먹지 않은 기분 좋은 날엔 밖에 나가지 않는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지난번 마트에서 사 온 계란이 두 판이나 쌓여있었다. 동글동글 귀여운 계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음식이 있는데 써니사이드업이 그중에 하나이다.
어린 시절부터 즐겨 먹었던 계란이지만 요리 이름에 크게 신경 쓰면서 먹을 만한 음식은 아니었다. 저렴한 가격에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어 없는 살림에 큰 보탬이 되는 그런 음식이었다. 부모님들 입장에서 보면 고기가 많지 않았던 옛날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귀중한 단백질 섭취가 가능한 완전체에 가까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30개들이 한판을 몇 판을 사서 쌓아놓고 먹곤 했는데 사실 그다지 맛있는 편이 아니라서 계란이 반찬으로 나올 때면 적잖이 실망을 하곤 했다. 후라이판에 구울 때는 노른자를 터뜨리거나 그냥 익히던지, 물에 삶을 때는 완숙이나 반숙, 혹은 계란을 여러 개 풀어 계란찜 혹은 계란말이 등등 다양한 조리법을 동원하여 다른 요리처럼 보이려고 노력을 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참 고생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네다섯 개의 계란을 깨서 노른자와 흰자를 섞은 다음 야채를 다져 넣고 김을 중간중간 집어넣어 계란말이로 만들면 맛있긴 했다.
다 커서 혼자 살게 되었을 때도 돈이 없고 배는 고플 때 간단하게 반찬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자주 해 먹곤 했다. 혼자 먹을 때는 간단히 후라이팬에 구워서 밥 위에 올렸고 백반집에서는 기본으로 구운지 오래되보이는 후라이들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고기 같은 게 흔해져서인지 식탁 한구석에 습관처럼 올라올 뿐이었다.
그렇게 계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어진 사회 초년생 일 때 베트남 출장을 가게 되었다. 젊었을 때 출장을 가면 조식 서비스를 항상 신청하곤 했다. 비싸긴 하지만 회사돈이기도 하고 뷔페식으로 여러 음식을 조금씩 먹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호텔 조식이 잘 맞는 편이었다. 지금은 뷔페보다는 그 지역에서 아침을 먹을 만한 맛집을 찾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다양한 음식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뷔페라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뷔페이지만 동남아시아 쪽 호텔 조식은 그리 맛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라 아침에 식당으로 내려가니 좁은 공간에 하얀 테이블보가 덮여있는 10개 정도 테이블이 있고 한켠으로 놓인 긴 테이블 위에 한식과 베트남 음식과 빵들이 놓여있는 뷔페가 있었는데 음식들이 전부 식어있어서 영 땡기지 않았다.
그런데 한쪽 끝에 철판요리를 하는 곳이 있었고 그곳에 사람들이 몇몇 모여있었다. 나도 뭔 일인가 해서 접시를 들고 그쪽으로 이동했다. 고객이 신청하면 계란을 가지고 오믈렛이나 후라이를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오믈렛은 치즈를 안쪽에 넣은 후 계란을 말아주는 것이어서 유당불내증인 난 후라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계란 후라이가 영어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내 차례가 왔지만 에그까지만 딱 생각이 나서 멍하니 서있었는데 요리사가 계속 뭔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에그후라이라고 얘기했지만 못 알아 들었다. 한참을 설명하던 요리사는 다시 한 단어만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써니 사이드업? 써니 사이드업?
뒷사람들이 많아 난 일단 오케이 했다. 자작한 기름에 계란을 딱 올려서 아래쪽만 바짝 익혀서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작고 하얀 접시의 가운데 있는, 노른자가 동그랗게 솟아있는 계란후라이는 어쩐지 요리의 하나 같이 느껴졌다. 그전까지는 접시 하나에 계란후라이 한 개를 올려놓은 적이 없으니 그게 그렇게 잘 어울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Sunny Side-Up이라는 말이었다. 노른자가 위로 간다는 뜻이긴 한 것 같은데 직역하면 햇볕이 잘 드는 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난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평상시 수면아래 어두운 물밑에 몸이 가라앉아 있는 기분의 나에게 태양이 동그랗게 떠있는 것 같은 써니사이드업은 단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음식이 되었다.
한국에서 써니사이드업이라고 말할 일은 사실 많지 않다. 계란 하나를 정성껏 만들어주는 일도 드물고 대부분 계란말이나 찜 같이 만들어져 반찬으로 나올 뿐이다. 계란후라이를 해준다고 하면 노른자 터트리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는 정도이지만 얘기할 기회가 흔하지는 않다.
하지만 집에서는 혼자 써니사이드업~이라고 중얼중얼 하면서 계란을 후라이팬에 요리한다. 기름을 자작하게 붓고 조금 센 불에 튀기듯이 하면 바닥은 바짝 튀겨지고 위에 흰자는 익음과 안 익음 사이에 위치하고 황금빛 노른자는 아름다운 곡선을 뽐내면서 흰자 위에 올라간다. 담기 전에 굵은소금을 살짝 뿌려 간을 맞춘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 하얀 접시에 담아 포크나 젓가락을 이용해서 흰자의 바깥 부분부터 먹기 시작한다. 굵은소금으로 간을 한 흰자는 바삭바삭하니 너무 고소하다. 흰자를 조금씩 아껴먹다 마침내 다 먹고 나면 터트리지 않은 노른자는 버린다.
난 노른자를 싫어한다. 특히 서울에 올라오면서 느끼기 시작한 것인데 안 익은 노른자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느낀 다음부터는 덜 익은 노른자를 먹지 않게 되었다. 나의 이런 점을 보면 역시 사람들은 뭐 하러 노른자를 안 익혀 달라고 했냐고 한소리를 한다. 써니사이드 업이잖아요라고 얘기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오늘은 노른자의 색이 안 좋다거나 살짝 비린내가 난다던가 하는 핑계를 대고 얼버무리곤 한다.
노른자가 익으면 써니사이드업이 아니다. 오늘 같이 집에서 혼자 써니사이드업을 만들면 변명할 이유도 없고 내가 좋아하는 익힘으로 요리할 수 있어 행복하기까지 하다. 계란을 먹을 때 언제나 내 마음은 써니 사이드 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