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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18. 2020

꿈이 '소설가'였던 1993년의 너에게

1993년 7월 4일, 날씨: 맑음

1993년 7월 4일 월요일  날씨: 맑음


제목: 소설


우리 집에 컴퓨터가 있어서 난 컴퓨터에 글을 많이 입력해놓는다.

난 책을 2권 지어보았다.

하나는 3학년 때 1년동안 쓴 일기를 종합한 것이고, 하나는 내가 명랑소설처럼 지은 책이다.

이번엔 컴퓨터에 먼저 하루의 일기처럼 수록해 놓았다.

등장인물은 우리 반이고 내용은 내가 짓는 것이다.

글을 짓는다는 건 참 재미있는 것이다.

제1장을 완성했다. 정말 힘들었다.

컴퓨터가 꽉 차게 글들을 입력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꿈이 '소설가'였던 1993년의 너에게


안녕? 날씨도 더울텐데 잘 지내고 있니?


나는 2020년을 살아가는 너란다. 이제 나이는 서른일곱이 되었고, 결혼을 해서 아내와 두 아이와 같이 살고 있지. 그 때의 너는 열 살밖에 안되었었구나.


벌써 27년 전이네. 장래희망란에 늘 '소설가'가 쓰여있던 그 때의 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학생 형들을 둔 덕분에 비록 가난한 집이었지만 작은 방에는 어엿한 286 개인용 컴퓨터(PC)가 놓여 있었지.


형들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열심히 타자연습을 하고, 창작한 '명랑 소설'을 타닥타닥 소리를 내가며 써내려가던 네 모습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구나. 비록 그 소설을 읽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지만 말이야.

그 때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본단다.


너는 그 때, 집 책장에 꽃혀있던 소설들을 두루두루 읽었지. 어린이에게 맞는 책은 별로 없었고, 이문열, 양귀자, 박범신, 박완서 등등의 작가분들이 썼던 한국소설들을 재미있게 읽었었던 것 같구나.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소설이 참 재미있었지. 양귀자, 박범신 선생님의 책이 있었던 것은 아마 그 맘 때 연애를 하고 있거나 연애소설을 좋아하던 20대의 형 누나들이 있어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글들이 알게 모르게 훗날 너의 사랑과 연애에도 영향을 미쳤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여섯 명의 식구들이 함께 살고 있었지만 각자의 일로 모두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을테니 집에서 책을 읽는 때가 너의 열 살에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지도 몰라.


너의 글을 가장 좋아해주는 첫 독자는 다름 아닌 너의 친누나였을거야. 담임 선생님도 가끔 일기 검사를 하면서 드문드문 첨삭을 해주시기도 했지만, 누나는 막냇동생인 너를 꽤나 많이 좋아해주었고, 너의 생각과 마음을 글로 읽는 것을 좋아했었지. 그녀 역시 문학 소녀였기에 상투적으로 글이 흐르지 않도록 지도까지 해주었어. 그 덕분에 '나는 오늘'로 시작하여 '참 재미있었다'로 끝나는 전형적인 일기 습관을 고쳤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너의 '소설가'라는 꿈을 접게 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 역시 누나였지. 누나는 4남매 중의 장녀여서 그런지 책임감이 강했고, 대학에 가지 않고 스무살 때부터 회사에 다녔어. 그 때는 그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누나에게 참 미안했지 뭐니. 형들이나 너보다 못난 것 없는 사람이었는데, 집 안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여자였다는게 그녀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한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단다. 누나도 그 때는 자기만 대학에 가지 않았던 것을 한탄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못내 한이 되었는지 오십이 다 되어서 모 대학교 영문과에 다니더라. 그것도 무척이나 모범생으로. 대학에서 배운 영어 가지고 지금은 미국이랑 캐나다랑 영국이랑 막 다녀. 길가에 강아지만 보아도 발을 못 내딛던 네 누나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말이다.


누나는 너에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어.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실감나게 묘사해주었지. '소설가'들은 늘 수염을 깎지 않고 생계를 잇지 못해 컵라면을 먹으면서 지낸다는, 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는데. 아마 너는 그 때 다짐했을 것이다. 가난을 되물림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소설가'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누나 말대로 '그런 일은 취미로도 할 수 있으니 일단 생계를 이어나갈 직업을 먼저 가지고 시간이 있으면 글을 쓰는 게 맞다'고 판단했을 거야.


나이 열 살에 그런 판단을 하고, 넌 그 다음부터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 당장 학교에서 내라고 하는 독후감을 쓰거나 백일장에 나가 주어진 주제에 맞는 글을 쓰기도 했고, 가끔은 '반공 의식 함양 글짓기 대회' 같은 데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글을 썼던 것 같기도 하구나. 장래희망란을 작성해야 하는 너의 펜은 마치 갈 곳을 잃은 방황하는 양처럼 한참을 배회했어. 결국 눈 앞에 계시지만 별로 존경하지는 않았던 선생님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냥 별 생각 없이 '교사'를 적어내기도 했었지.


그 때의 네가 때론 대견하기도 했었다. 그 때부터 너는 현실과의 전쟁을 선포한 셈이었고, 너는 매일을 성실하게 살아내려고 노력했단다. 공부도 곧잘해서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내내 장학금을 받고 살게 되었어. 하지만 그것은 그저 생존을 위해서였지. 필요한 공부을 하며, 필요한 글을 쓰며 살았어. 지금의 나도 그러한 노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어른들이 너에게 철이 일찍 들었다고 칭찬하시는 것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니란다. 어린시절부터 시작된 너의 생존을 위한 노력들은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웠어.


하지만 이음아,

내가 그 후로 27년동안 살아오면서 정말 아쉬운 점이 뭔지 아니? 제대로 된 꿈을 꾸어보지 못했다는 거야. 늘 생계를 생각하며 성실히 살아왔지만 여전히 나는 가난하단다. 내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7년 넘게 살아오면서 가장 미안한게 뭔지 아니? '꿈많은 소녀'를 사랑한다고 데려와서는 나같이 '현실'만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거야. 꿈이 밥먹여주는 게 아니라고 나는 아내에게 늘 이야기했지만, 사실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건 아니잖니? 가슴이 뛰어야 사는거지. 게다가 '성실함'만으로 밥을 먹고 사는 시대도 지나버렸단다. 네가 과학 상상화 그리기에서 그렸던 2020년은 자동차가 날아다니지는 않아. 다만 필요에 의해서 성실히 미래를 준비했던 개미들보다 자신만의 꿈을 좇으며 배짱 있게 자신의 미래를 베팅했던 베짱이들이 더 풍성한 삶을 살고 있단다.


현실과 생계에 대한 인식은 삶을 이어가는 데 필요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걸 27년전 너에게 말해주고 싶구나.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현실'에 가두기보다는 그냥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너는 원래 그렇게 현실과 필요만으로 살아가던 아이는 아니었단다. 286 컴퓨터에 명랑 소설을 써내려가던 너는 27년이 지난 지금도 너만의 글을 써내려가고 있지 않니? 돈 한 푼 얻는 것 없지만.. 그저 네가 좋아서 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오늘은 이만 줄인다. 27년이나 더 나이를 먹었더니 글이 굉장히 딱딱해지는구나. 다음부터는 좀 부드럽게 쓰려고 노력하마.


2020년 3월 18일 수요일

서른 일곱살이 된 

다름 아닌 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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