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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Aug 27. 2021

'뭣이 중헌디!', 모가디슈의 '느슨한 연대'의 외침

영화 '모가디슈' 리뷰

인종차별이 일상이었던 때의 한 사회학자의 관찰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사회적 시선이 거두어진 탄광 속, 그들만의 고립된 세계 내에서는 ‘친구’로 지내던 흑인과 백인들이 탄광 밖으로 나오면서는 눈빛조차 나누지 않으며 헤어지는 모습을 그 사회학자는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 묘사를 보면서 차별의 시대, 그들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았었다. 탄광 속의 그들은 ‘한 배’를 탄 마음이었을 것이다. 혹여 사고라도 터지면 그 상황을 같이 겪어나가야 할 생존의 무게 앞에서 인종은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탄광은 바깥 세상보다 많이 어둡지만 어쩌면 마음의 불을 밝히는 공간이었을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맥락에 휩쓸려 산다. 병원에서는 의사라는 집단과 간호사라는 집단이 공존하면서도 따로 존재한다. 대학이라는 공간도 교수와 직원, 학생 등 다양한 집단이 함께 존재하며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오묘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서로를 이데올로기적 또는 기능적인 타이틀로 정의해서는 그 역할에 몰입하여 갈등을 겪다가도, 때로는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보편적인 정서를 나누기도 하는 것들을 보고, 경험한다. 나는 그러한 경험들을 할 때마다 20세기 초의 미국 탄광촌을 떠올리곤 했다.      


※ 영화 '모가디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유의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보게 된 ‘모가디슈’라는 영화는 다시 그 감정을 소환시켰다. ‘모가디슈’는 소말리아의 수도의 이름이다. 영화는 1990년대 초, 소말리아 내전이 발발했을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비슷한 상황, 당시 소말리아의 부패한 정부는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통제력을 상실했고, 반군 세력은 순식간에 수도인 모가디슈까지 장악하게 된다. 그 곳에 상주하던 남과 북의 외교관들은 소말리아의 원 정부를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UN에 먼저 가입하기 위해서는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아프리카의 나라들의 마음을 먼저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양손 다 씁니다. 왼손만 쓰면 좌파라고 해서.


대한민국 대사(ambassador)인 한신성(김윤석 분)의 대사처럼 그 시대는 아직 냉전(cold war)의 냉기가 여전히 팽배할 때였다. 외교관은 나라를 대표해서 타지에서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에 어느 것이 사회적 정체성이고, 어떤 것이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직업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참사관 강대진(조인성 분)이나 북한의 대사인 림용수(허준호 분)를 비롯해 태준기 참사관(구교환 분) 자신의 역할에 푹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고, 본국과의 통신까지 두절된 상황에서 남과 북의 외교관들은 더 이상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북한의 대사관은 정보원으로 믿었던 반군 세력에게 침입 당해 외교관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전쟁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는 길거리로 내몰리는 극한 상황이다. 모두의 목표는 ‘외교전 승리’에서 ‘생존’으로 바뀐다. 이러한 상황은 역할극에 몰입해있던 외교관들로 하여금 정치·사회적 완장을 강제로 내려놓도록 만든다.     

모두의 목표는 ‘외교전 승리’에서 ‘생존’으로 바뀐다.


소말리아 내전 이전부터 치열한 ‘외교 전쟁’을 벌이던 사람들은 이 극한 상황 앞에서 비(非)자발적으로 ‘연대’한다. 비록 각국의 이데올로기적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특히 강대진(조인성 분) 참사관이나 태준기 참사관(구교환 분)의 캐릭터는 젊고, 열정적이이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목숨만큼이나 각국의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적 승리가 중요하다. 북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이들을 전향시켰다는 실적이 너무나 필요한 강 참사관(조인성 분)은 ‘전향서’를 허위로 위조하다가 태준기(구교환 분)과 극하게 대립한다.      


하지만 한신성 대사(김윤석 분)과 림용수 대사(허준호 분)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적 관계 진전은 참사관들의 대립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서로의 자존심과 사상적 궤적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생존’과 ‘인류애’라는 보편적 목표로 담백하게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영화는 무리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이들의 연대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병헌과 신하균, 송강호의 연대와는 성격이 다르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무채색의 상황이라는 것은 비슷하지만 ‘모가디슈’의 연대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담백하며 느슨하다. 결국 사상적 전향도 일어나지 않았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되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생존’을 위해 한 배를 탔고, 그 안에서 내면적으로 연대했으며, 다시 볼 기약도 없이 인사를 나눈다. 영화는 무리하지 않았고, 신파를 띄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이들의 연대는 더 마음에 다가온다. 현실적이고, 그래서 깊다. 어쩌면 ‘다시 볼 일이 없는 타자’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 영화는 두 대사의 모습을 통해 담담히 그려낸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한 배를 탔고, 그 안에서 내면적으로 연대했으며, 다시 볼 기약도 없이 인사를 나눈다.


마지막 장면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비행기가 케냐의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 림용수 대사(허준호 분)은 한신성 대사(김윤석 분)에게 그동안 경황이 없고, 자존심이 내려놓아지지 않아 전하지 못한 감사함을 표현한다. 강 참사관(조인성 분)은 이제 비행기에서 내리면 남과 북의 외교관계자들이 나와있기 때문에 서로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한다고 알리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그렇게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 각자의 버스에 탄다. 각 버스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그렇게 그들의 생존을 건 연대는 한 순간에 끝이 난다.  

    

우리는 생각이나 마음을 일치시키지 않아도,
다시 볼 일이 없는 일회적 만남 속에서도,
인간이라는 공통 분모 안에서 연대할 수 있다.  


나는 그 느슨하고도 깊은 연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일들을 꿈꾼다. 영화 ‘모가디슈’는 너무나 마음 아픈 배경을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발견되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탄광의 어두움이 인종차별의 어두움을 몰아내듯, 내전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듯, 다사다난한 우리의 인생 속에는(그것이 때로 고난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연대'의 희망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내전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듯, 다사다난한 우리의 인생 속에는 그러한 희망의 빛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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