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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공작 Aug 25. 2023

#너에게 잠기다

꺼내먹는 로맨스

S씨와 처음으로 만난 곳은 동해의 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당시 나는 20대가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국내의 이런저런 곳을 돌아다니며 허무한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 동해는 1개월이나 계속된 기나긴 '자아 찾기'의 마침표를 찍는 곳이었다. 여행객의 발걸음이 점점 줄어들던 여름의 끝무렵, 그것도 평일의 게스트하우스는 텅 비어있었다.



아니, 텅 비어있어야 정상이었다.



"당신 , 운이 좋네. 저쪽의 누님하고 단 둘이니까 말이야." 오너가 가리키는 곳에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옷차림의 S씨가 앉아있었다. 새하얀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슬랙스, 그리고 검은 힐. 번화가의 카페나 호화로운 가게에서나 볼 법한 인종과 이런 촌구석에서 조우할 줄이야.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몇 번이고 언덕길을 올라야 하는 이 게스트하우스를 저 차림으로 도대체 어떻게 오른 거지. 놀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인기척을 느낀 건지 그녀가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짓는 그녀에게, 나는 당황해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짐, 짐 놔둬야지'하고 중얼거리며 허겁지겁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요. 제가 읽고 있던 책이 신경 쓰이셨던 거죠?"



짐을 정리하고 홀로 나왔더니, 그녀가 이쪽을 보며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의미지'하고 한순간 머리가 멈췄지만,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어요!'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어 끄덕였다.



"동해는 처음이신가요?"


"네."


"그러면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이렇게 보여도 동해만 벌써 5번째거든요."



'방금 전에 그쪽이 읽고 있던 책 이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유'였던 것 같은데. 언행불일치인 건 아닌지'라고 말하려다 꾹 삼키고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곳을 데려가 주시려나'하고 생각했더니, 하루 종일 바닷가를 따라 걷기만 했다. 엘레강스한 도시의 여자와 거지꼴의 백패커 커플이 신선했는지, 사람들이 지나쳐갈 때마다 우리 쪽을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살짝 괴짜이긴 해도, S씨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여러 개의 모래사장을 물들여갈 무렵이었다. S씨가 근처에 있던 부두를 가리키며 "저기서 마시죠"하고 제안해, 4개에 만 원 하는 편의점 맥주 번들과 안주용 과자를 사서 자그맣게 연회를 열었다. 효율이 좋은 그녀는 첫 번째 맥주캔이 반이나 남았는데도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바다는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지평선은 깔끔하게 찍을 수 있는데도 바다의 전부를 사진으로 담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해봐도 찍을 수 있는 건 겨우 지평선의 절반. 지금까지의 연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좋은 사람과 만나서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더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지 못해 결국 헤어지기를 반복했어요. 그 끝에 남은 건 언제나 이기적인 자신 뿐이었죠. 자기 일로 벅찬 사람에게 연애할 자격 따위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취한 그녀의 뺨처럼 붉은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지려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발상이네요. 하지만 연애는 원래 이기적인 둘이서 하는 게 아닌가요? 두 개의 I(愛)를 무리하게 이어붙였으니까, 연애는 본질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바다의 절반밖에 담지 못했던 두 사람이 만나 붉은 실로 맺어져 비로소, 서로의 존재가 상대에게 흘러들어 마침내 하나의 바다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요."



까지 말하고, 잘난 듯이 주절대는 자신이 부끄러워 입을 닫고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러자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한 마디를 건넸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낮은 곳으로



그녀가 말을 건네던 순간,


내 마음속에 다가와 울린 것은 파도 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맥주 캔이 텅 비었을 땐, 동해의 작은 어촌은 이미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서울이었다면 밤의 주민들이 꿈틀대기 시작할 시간이지만, 여기는 빛도 소리도 곳곳에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고요해진 밤의 마을에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파문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또각또각, 터벅터벅. 구두와 운동화의 리듬에 심장 소리가 녹아들어 듀엣이 트리오로 바뀌었다.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어요."



라고 말하는 그녀의 뒤를 쫓아 도착한 곳은, 게스트 하우스 바로 위에 있던 등대였다. 언덕 위에 주렁주렁 달린 양철지붕의 집들, 그 꼭대기에 서 있는 등대였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여기를 고른 건지 의문이었다.



"경치를 보기 위해서면 해가 지기 전에 오는 게 낫지 않았나요?"



하고 투덜댔더니, 그녀가 검은 긴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하길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던 바다도 어둠에 삼켜져서 그런지 새까맣네요. 하지만 뒤를 돌아봐 주세요."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돌아보자, 반딧불 몇 마리가 빛을 내뿜듯 집들 사이에서 하얗고 노란 빛방울들이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생명의 증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들의 일상도 누군가의 눈에는 이토록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그리고 그녀도 나도 겨우 반나절에 불과한 오늘의 만남을 꿈만 같았다고 느끼게 되는 걸까.



월요일이었던 다음날, 일어나보니 그녀는 이미 체크아웃을 마친 뒤였다. '출근해야 하니 빨리 나갈 생각이에요.' 그것도 고려해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건만, 늦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 그녀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 다가가 보았더니 메모 한 장이 놓여있었다.



'나중에 여유롭게 잠길 수 있을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답장이라 하기도 뭐하지만,


저도 서투른 글솜씨로 당신을 그리며 추억에 잠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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