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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May 03. 2020

재능을 죽이는 애매한 현실

그림을 그리다 #1

얼마 전, 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펜그림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은 거의 처음이다. 한 3~4년 전쯤 귀여운 일러스트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책 한 권 사서 시도한 적은 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그만둔 것이 전부다. 그려야 할 이유도, 흥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공대를 나와 엔지니어의 삶을 살고, 그 이후에도 논리적인 사고와 디자인적 사고를 통해 문제 해결을 하는 일을 했기에, 그림은 필수적인 부분이 아닌 부수적인 부분이었다. 다만, 이따금씩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미적 재능을 전공으로 삼지 않아 미술 전공자들에 비해 늦었지만 어떻게 하면 개발해 볼 수 있을지 고민을 했었다. 나에게 의미 있는 재능이 맞는 건지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그 테스트는 현재 진행 중이긴 하다.


사실, 재능이란 아무리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났다 할지라도 제때 잘 길러지지 못하면 결국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모든 사람이 김연아, 손흥민 선수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타고난 재능을 잘만 계발시키면 얼마든지 훌륭하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물론, 재능이 없다고 해서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 또한 아니다. 재능이 있으면 단지 출발선에서 약간의 유리함이 있을 뿐이지 반드시 전제조건은 아니다. 수많은 뇌과학적 연구와 실험의 결과를 담은 책들은 천부적인 재능이 없더라도 꾸준한 노력으로 탁월한 실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에 동의한다.


물론, 엄청난 실력을 겸비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즘은 그와 달리 자신의 행복, 재미, 흥미, 취미를 목적으로 즐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굳이 프로와 아마추어라는 말로써 각 개인의 능력과 상황을 제한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경제적 가치 창출의 기준, 타인의 인정, 범주화, 용어에 의한 합리화와 중압감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다만, 최근에 매일 꾸준히 그림을 그리다 보니, 미술(그림, 디자인 등)이라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의 생각들을 듣다 보니, 그리고 예전에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읽은 후에 문득, 아니 꽤 자주 재능을 키우지 못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겨울왕국의 올라프 그려보기


디자인을 전공하거나 혹은 예술계통의 전공자들은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도 하지만 포기하고 좀 더 '돈'이 되는 직업을 택하기도 한다. 예술을 하면 배고프다는 인식이 통용되는 것 같긴 하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다른 직군에서도 어느 전공을 택해도 비슷한 결과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한때 '문송'(문과여서 죄송)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과가 구직에 유리한 현실을 희화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이과 출신들도 결국 전공이 맞지 않아 다시 새로 공부하여 자신만의 직업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관심사, 흥미, 잘하는 분야를 택했지만 현실적인 여러 이유로 자신의 길을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한다.


나는 어릴 때 미술에 재능을 보였지만, 수학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과목과 그 분야를 택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그 분야로부터 뒤통수를 맞고 심리적으로 갈 곳을 잃기도 했다. 뒤늦게 취미 삼아 그림을 그려보고 있다. 너무 오랜만이다. 그런데 순식간에 시간이 통째로 날아갈 만큼 엄청난 몰입과 집중이 된다. 어쩌면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취미로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업이 되는 순간 흥미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재능을 타고 났건 아니건 어떠한 분야의 능력을 개발시키는 과정과 방법,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 예를 들면 <그릿>이나 <탤런트코드> 같은 책들을 통해 너무 쉽게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긍정적인 메세지를 들어왔다. 그런데 몇 달 전 읽은 <아웃라이어> 책은 나를 너무나 가슴 아프게 했다. 가지고 있는 재능을 살릴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1만 시간 동안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 매진했더라면... 이라는 해서는 안되는 가정을 반복해서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최대한 똑같이 보고 그리는 일, 비슷하게 표현하는 일, 즉 모방에 가장 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현실은 창의성을 강조했기에 미술은 내 길이 아니구나 일찌감치 포기했다. 나는 보고 따라 그리는 일에 가장 자신이 있었지, 추상적인 그림이나 창의적인 무언가를 뿅 하고 생각해 내는 것을 훈련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잘할 리가 없었다. 똑같이 따라 그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 나에겐 그렇게 매력적인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애초부터 기회의 싹을 스스로 잘라냈다.


20년이 흐른 지금 다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알게된 사실은, 보고 따라 그리는 일이 생각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똑같이 그리는 능력있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오히려 자신만의 그림체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신만의 해석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방이라는 기술을 살리지 않은 것도 아쉬웠고, 창의적인 작품에 다가가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나의 어리석음을 다시 한 번 깨달으니 그 아픔이 가슴을 찔렀다.


현실은 누군가의 재능의 싹을 쉽게 잘라낸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주변에 널렸다는 사실.

나보다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에 대한 인지 부족.

재능은 타고나야만 한다는 단편적인 생각.

회사에 맞춤형 인재로 스펙만 요구하는 사회.

가능성을 너무나 빨리 포기해버리는 어리석음.


그리고 안타깝게도 다방면에 관심이 있다보면 특정 분야에 쏟을 노력과 시간은 함께 분산된다. 나에게 독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래서 과거에 인정받았던 재능은 대부분 애매한 재능으로 몰락해 버린 듯싶다. 집중적으로 개발할 시간과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탓에.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

하지만 어릴 때 기회를 놓쳤다고, 평생 못하리라는 법 또한 없다.

무엇이 되겠다, 무엇을 만들어보겠다 야심찬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매일 조금씩 그리다보면 또 새로운 세상이 연결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어제보다 좀 더 나은 오늘의 작품이 탄생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나를 테스트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펜으로 끄적끄적 그림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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