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 그 이름도 참 생소했다. 우리나라 화이트 와인의 앞날을 밝혀줄 그 이름. 아주 우연히 '청수'를 만나게 되었다. 지난 12월 말경, 대부도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에 있는 "그랑고또 와이너리"는 그렇게 여행 중 우연히 들르게 된 것이다.
내가 와인을 좋아하고 알고 싶어 하던 세월을 지나, 본격적으로 마시면서 즐기기 시작한 것은 2017년부터다. 첫 해는 정말 무식하게 돈을 써가면서 와인을 몸으로 배웠다. 돈만 써서는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기지도, 와인 지식이 쌓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꽤 많은 비용을 지불한 뒤에야 깨달았다. 그 이듬해에는 책을 통해 공부하며 맛과 향을 비교하게 되었다.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기에는 시간도 돈도 모두 부담스러웠다. 혼자 리서치를 하고 꾸준히 독학하며 여전히 와인을 즐기는 애호가다.
마치 당구를 처음 배울 때 내기 당구를 하며 당구장에 들이붓는 돈이 엄청나듯이, 내가 초반에 와인에 쏟아부은 돈도 만만치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나 질을 높이기 위해선 양적으로 먼저 기본이 쌓여야 하는 것은 와인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후회하진 않는다. 그 덕에 많은 와인을 접해보았으니 말이다. 다만 그간 부족한 지식으로라도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랑고또 와이너리 도착! 아마 남편이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여기에 들르지 못했을 것이다. 난 심지어 대학원 논문을 위해 한국 와인과 와이너리를 공부했음에도 대부도에 그랑고또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어이쿠야.
그랑고또 와이너리 내부 사진
내부를 둘러보고, 테이스팅과 투어가 가능함을 안내 받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투어가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기에 시음만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랑고또 와이너리에서 우리에게 안내해준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품종은 총 두 가지 '캠벨얼리'와 '청수'로 만든 와인이 이곳에서 생산 및 판매를 한다고 했다. 90%가 캠벨얼리, 10%가 청수. 사실 해외 와인을 주로 마셔봤기 때문에 우리나라 와인 자체는 생소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와이너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우리나라의 와인 역사는 매우 짧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와인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와인 맛에 있어서 품종도 중요하고, 그 나라의 기후, 토양 등 환경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포도 품종과 기후 및 토양은 와인 제조에 있어서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고 알고 있다. 와인 전문가들은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 품종에서 기회의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해왔었다.
시음하기에 앞서, 청수와 그랑고또 와인에 대해 설명해준 담당자는 '청수'와인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격이 6만원대임에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라는 것을 말로만 들어도 실감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도 인정하고 국내 호텔에서도 없어서 못 판다는 이 '청수'라는 와인, 정말 궁금하게 만들었다. 찾아보니 청수 와인은 국제포도와인기구(OIV)에서 인증하는 3대 와인 시상식 중 하나인 '아시아와인트로피'에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연이어 골드상, 실버상을 받았다고 한다.
와인 테이스팅 장소
와인 테이스팅 하는 장소 역시 꽤 분위기 있게 세팅되어 있었다. 12월에 걸맞게 크리스마스 장식품이 한결 분위기를 따뜻하고 조화롭게 연출하는 듯싶었다. 두 가지의 와인을 골라 시음을 할 수 있었는데, 처음에 그랑고또 랑와인과 그랑고또 로제 와인을 시음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열심히 듣고, 구경하고, 고민하는 게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담당해주던 분이 테이스팅으로도 제공을 잘 안 한다는 '청수'를 맛보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랑와인과 로제 와인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했지만, 그래도 냉큼 그 제안을 수락했다. 청수가 등장했고, 테이스팅 잔에 따른 후 인증샷을 남겼다. 시향 후 한 모금 시음하니, 와우! 신세계였다. 우리나라 화이트 와인이 이렇게 향이 좋고, 달콤하고 상큼한 게 있었단 말인가! 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원석을 발견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청수는 샤르도네(샤도네이)보다 향이 풍부하다. 열대과일향 종류이면서 훨씬 달콤한 향이 섞여 있다. 그리고 샤르도네보다 더 상큼하다. 나는 신 맛을 별로 선호하진 않지만 화이트 와인 특유의 상큼함은 페어링 음식에 따라 즐기기도 하는 편이다. 그런데 청수의 상큼함은 디저트랑도 잘 어울릴 것 같고, 해산물류나 특히 회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상큼함이었다. 소비뇽 블랑에 비하면 입안에서 느껴지는 청량감의 강도는 약하다. 오히려 묵직한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리슬링은 물론 등급에 따라 당도가 다르긴 하지만, 가장 덜 단 카비네트 기준으로 봤을 때 청수도 비슷하게 달달하다. 하지만 상큼함이 함께 더해지기 때문에 엄청 달다는 느낌을 덜 받는다. 말 그대로 달달, 상큼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웬만큼 와인을 즐겨왔지만, 와인은 꽤 비싼 술이다. 그래서 한 병을 살 때도 사실 가격을 늘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와인을 사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랑고또 와인 시리즈는 청수에 비하면 가격대가 낮다. 그렇다고 마트에서 파는 1만원 이하의 와인처럼 저렴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청수를 포함한 그랑고또 로제와 레드와인도 함께 사 왔다. 그리고 얼마 전 참치회와 아끼던 청수를 오픈했다. 먹으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먹는 동안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소고기보다 회를 더 좋아할 만큼 회는 나의 최애 음식이다.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을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청수라는 와인이 궁금해서 나름 좀 더 알아보았다. 청수는 1993년에 개발이 완성된 품종이다. 처음엔 생과용으로 개량 품종을 재배하였으나, 청수 품종 특성상 익어감에 따라 포도알이 쉽게 떨어진다는 이유로 상품성이 낮아 농가로부터 외면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개량 이후 거의 20여 년 동안 거의 사랑받지 못했던 품종이 와인 양조용 품종으로 거듭나게 된 데에는 농촌진흥청의 노력이 크다고 했다. 와인 전문가로부터 '청수로 만든 와인의 풍미가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생과용에서 와인 양조용으로 활용도를 변경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청수 와인이 국제포도와인기구가 주최하는 와인 시상식 중 하나인 '아시아와인트로피'에 참가하여 입상을 이어가며 세계 무대에서도 그 품질을 인정받자 생산량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청수 품종으로 양조를 할 때는 다 익기 전에 수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또한 처음 알게 된 부분은, 청수는 레드와인 방식으로 양조를 한다는 것이다. 와인의 향은 과피에 있다고 한다. 이것을 최대한 짜내고 착즙이 잘 되도록 껍질을 발효시킨 후 빼내는 것이 레드와인 방식인데, 이것을 청수 와인에 적용한 모양이다.
청수는 현재 경기도 안산의 그랑고또, 충북 영동의 불휘 농장, 경북 영천의 고도리, 오계, 조흔, 경북 영주의 쥬네뜨, 경북 경산의 비노 캐슬 등 7개 와이너리가 만들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제 겨우 한 곳을 경험했을 뿐이다. 다른 와이너리에서 제조한 청수도 동일한 맛과 향을 낼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청수는 시벨 9110(Seibel 9110)과 힘로드 시들러스(Himrod Seedless)의 교잡을 통해 탄생했다고 한다. 와인21닷컴 내용을 살펴보니, 광명동굴 대한민국 와인 페스티벌에서 맛볼 수 있었던 세 가지의 청수 와인이 모두 뚜렷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고도리 와이너리의 경우, 신선한 풀잎과 미네랄리티가 느껴져 루아르 지역을 연상시킨다고 했고, 불휘 농장의 시나브로는 귤, 오렌지 등의 시트러스 캐릭터가 느껴졌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선보인 와인은 열대 과실향이 풍부하고 아로마틱 했다고 하는데, 내가 마셔본 그랑고또 청수 와인은 그럼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같은 청수, 다른 풍미라면 직접 가서 시음해봐야겠다. 언젠가는 꼭 먹어보고 비교해볼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내맘대로 와인노트
그랑고또 와이너리에서는 바디감 2점, 산도 2점, 당도가 세미드라이라고 했지만, 내 기준에서는 모든 측면에서 그보다 높게 느껴졌다. 나는 내 입맛에 느껴지는 대로 평가를 남겨보려고 한다. 디자인처럼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맛을 느끼는 사람의 미각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