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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Sep 06. 2024

모아나. 소파. 우리.  그리고 무엇보다 딸기 와인.

6th day

아침에 일어나 읽다 만 책을 펼쳤다. 얼마나 읽었을까. 출출함이 올라왔다. 어젯밤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싸 왔던 고구마가 떠올랐다. 바로 냉장고에서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냉장고에 있던 체리도 씻어서 같이 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앉는데 셀린이 거실에 불쑥 나타났다. 언제 일어났는지 이미 옷까지 다 입은 상태였다.      


어젯밤 셀린이 내일은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인터넷으로 이곳 메릴랜드주에서 가볼 만한 곳이 있는지를 검색했다. 머지않아 아나폴리스(annapolis) 항구가 놀러 가기 좋다는 블로그 포스팅을 발견했다. 여기서 차로 1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셀린에게 말했더니 그런 곳이 있었냐며 처음 들어본다고 대답했다. 함께 탐험하는 마음으로 가보자고 제안했다.      


세수하고 대충 머리만 빗었다. 화장은 생략했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셀린의 영향으로 나도 화장하는 게 점점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약 2시간 후 셀린의 차로 아나폴리스 항구에 도착했다. 관광지 주차가 힘든 건 세계 어딜 가나 비슷한가 보다. 아무리 작은 항구라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길가 주차 구역이 차들로 빼곡했다. 항구 주변을 몇 바퀴나 돈 후 겨우 주차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숨이 턱 막히는 더위가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이렇게 찌는듯한 날씨에 돌아다녔다간 피부가 다 익어버릴 게 분명했다. 우리는 몇 걸음 못 가 바로 앞에 보이는 커피숍으로 돌진했다. 시원한 스무디를 마시며 전면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항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 부신 햇살 아래 잔잔히 일렁이는 파도. 그 위에서 살랑살랑 몸을 흔드는 보트와 요트. 마치 움직이는 수채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역시 이런 환상적인 풍경은 서늘한 에어컨 바람 속에서 봐야 제맛이다. 우린 살아있는 작품을 배경으로 둔 채 몇 시간 더 수다를 떨다가 그곳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월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직장에 돌릴 초콜릿을 2박스 샀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셀린이 오늘도 스테이크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오늘은 뭔가 색다른 음식먹고 싶었다. 메뉴 선정에 대해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셀린이 얼마 전 집 근처에 멕시코 식당이 새로 생겼는데 자기도 아직 가보지 못했다며 거기로 가보자고 말했다. 구글 리뷰를 확인해 보니 평점도 나쁘지 않았다. 우린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했다. 멕시코 남성으로 보이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메뉴판을 책 읽듯 진지하게 훑으며 그 식당에서 하나밖에 없는 수프와 소고기 치폴레(chipotle)를 시켰다. 셀린은 치킨 치폴레를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는데 종업원이 나초를 한 바구니 가져다주었다. 얼른 나초를 살사소스에 듬뿍 찍어 먹었다. 입안에서 만들어지는 바삭거리는 소리에 흥이 올랐다. 주문한 수프와 치폴레가 나왔을 때는 음식 바구니에 들어있던 나초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사라진 나초가 뱃속에서 불어나는 게 느껴졌다. 수프는 겨우 다 먹었지만, 치폴레는 결국 몇 입 먹지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우리는 전날처럼 종업원에게 남은 음식 포장을 요청했다. 곧 종업원이 포장한 음식과 계산서 판을 가지고 나타났다. 계산서 판을 열어보았다. 계산서에는 우리가 먹었던 음식값이 쓰여있었다. 어제 스테이크를 먹었을 때는 현금으로 계산했기에 팁까지 포함해서 주는 데 문제가 없었다. 오늘은 셀린이 가진 현금이 없으니 일단 자기 카드를 쓰겠다고 말했다. 나는 카드로 어떻게 팁까지 줄 수 있는지 궁금해져 셀린의 행동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셀린은 계산서 판에 신용카드를 꽂은 후 다시 돌아온 직원에게 돌려주었다.     

 

잠시 후 직원은 영수증 판을 다시 주었다. 열어보니 셀린이 주었던 신용카드와 팁을 요구하는 부분이 추가된 다른 영수증이 들어있었다. 종이에는 5%, 10%, 20%의 세 항목과 체크를 위한 빈칸이 보였다. 셀린은 이미 식당이  신카드를 등록했기에 원하는 항목에 표시하면 그들이 알아서 카드를 이용해 팁을 가져갈 거라고 했다. 우리 담당이었던 중년 남성은 시종일관 웃으며 좋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우리는 별 망설임 없이 20% 팁에 표시했다.      


다른 나라에 왔으니 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팁 문화를 경험할 때마다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쓴 것 같아 좀 아까운 마음도 있었다. 셀린에게 언젠가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은 꿈이 있는데, 팁을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문화권은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셀린은 팁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 아니며, 미국인들 중에서도 팁을 주는 문화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고 답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셀린은 오늘 밤에는 디즈니 영화 <모아나>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샤워하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셀린은 넷플릭스를 켜고 딸기 맛 와인 한 병과 잔을 가져왔다. 우리는 소파에 거의 드러누워서 함께 와인을 마시며 모아나를 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몇 년 전에 이미 보았었기에 내용을 다 알고 있었다. 줄거리를 아는 건 눈물을 참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울먹울먹하던 날 보며 셀린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대체 어느 부분에 눈물이 나는 거야?”


나는 초점 잃은 눈으로 어느새 다 비워진 와인병을 가리키며 엉뚱한 대답을 허공에 날렸다.


“모아나. 소파. 우리. 그리고 무엇보다 딸기 와인이 제일 완벽해….”


미국에서의 하루와 또 다정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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