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서 나의 집을 갖기까지…
처음 서울에서 가졌던 나의 첫 집은 한 평 반자리 옥상위에 지어진 가건물이었다. 1층에 공동 화장실이 있고 씻는 곳과 요리하는 곳이 한 곳에 있는 그런 집이었는데, 샤워를 할 땐 휴대용 가스버너를 방안에 옮겨둬야 했다. 그 집은 홍대 한 가운데 있었고, 보증금 50만원에 월 14만원을 냈다. 작은 냉장고, 컴퓨터와 헹거 하나를 두면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방이었는데 그 집에서 3년을 살았다. 그런 방이었어도 서울에 내 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때때로 감동했고, ‘홍대’라는 지리적 입지에도 만족했다. 그 집에 있으면서 나는 생애 첫 단편 소설을 썼고, 첫 연애도 했고, 첫 허리디스크를 얻었다. 어느날과 다름없이 샤워를 하려고 구부정하게 앉아있던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엉금엉금 기어가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밀양에 있던 동생은 그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일주일간 나를 간호해주고 떠났다.
두번째 집은 대학로에 있는 지하 원룸이었다. 창문에 서서 밖을 바라보면 걸어가는 사람들의 신발이 정면으로 보였으니 내 방은 완벽히 땅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집이 좋았다. 화장실이 안에 있었고 완벽하게 나만이 쓸 수 있는 단독세대였기 때문이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 20만원을 냈다. 보증금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당시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 가불을 해줬다. 한 달에 오십만원씩 갚으면서 보증금을 불려 모았다. 한 동자리 오래된 연립이어서 중간에 정원도 있고 동네도 조용하고, 주변에 고급빌라와 오래된 가옥이 어우러져 있는 혜화동이 좋아서 더 오래 살고 싶었지만 재개발 이슈로 거주 이전을 요청받았다. 나는 얼마 안되는 이사비를 받고 강제로 이사를 해야했고, 그 낡은 빌라는 고급 아파트가 되었다.
세번째 집은 삼선동에 있는 쉐어하우스였다. 이사비로 받은 돈은 턱없이 작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보증금으로 갈 수 있는 집은 없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가는 사이 빈 집에 들어와 살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읽고, 1번의 대면 만남을 통해 그 사람과 계약하게 됐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사람 좋게 생긴 남자였는데 그는 나에게 방과 거실을 대여해줬고 나는 그에게 매달 10만원씩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뉴질랜드에 있으면서 틈틈히 내게 엽서를 썼지만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1년 밖에 안살기도 했지만 그 집에 있으면서 안 좋은 일이 많아서였는지 대체적으로 그 집에서 지낸 기억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반지층 집이었는데 우울하고 어두운 기억으로 점철된 공간이었다.
네번째 집은 한성대 근처 단독 주택이었다. 언덕중간에 있던 그 집은 작은 방이 3개였고, 옥상도 쓸 수 있었던 집으로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나의 짐은 1톤도 안되는 작은 트럭으로 한 번 옮기면 끝나는 짐이었고 친구들이 와서 두어번만 나르면 이사가 끝날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다. 자주 이사를 다닌 탓에 큰 가구는 당연히 없었고 그릇이며 책이며 정말 필요한 것만 소유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 35만원자리 집이었는데 보증금이 부족해서 은행 다니는 친구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은행 대출은 신용이 낮아 받을 수 없었다. 은행 다니는 친구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했고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빌려준 돈으로 가까스로 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사하고 처음으로 내가 한 일은 친한 사람들을 불러 옥상에서 집들이를 한 것이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여름이 지날때까지 행복했다. 지하도 아닌, 쉐어하우스도 아닌 전망이 탁 트인 단독 주택에서의 삶은 특별하고 다를 것 같았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 버스를 타지 않으면 15분을 걸어올라와야했던 고단한 출퇴근 시간 덕에 특별한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번째 연애가 끝남과 동시에 그 집과도 이별하게 되어 송정동으로 이사했다.
송정동은 11평 정도 되는 반지층 집이었고 바로 앞에 산책로 둑길이 있고, 반지층인데도 환한 햇살이 비쳐드는 넓은 방이 마음에 들어 계약했다. 처음 가져보는 전세였다. 전세가 3천만원이었는데 2500만원이 부족했다. 2000만원은 동생이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가불 받고, 500만원은 당시 다니고 있던 회사 대표님이 사적으로 빌려줘서 월급에서 달달이 60만원씩 갚으며 전세금을 모았다. 그 집에서 무려 5년을 살았다. 주인은 한번도 전세금을 올린적이 없었고 나는 꽤 만족하면서 그곳에서 네번째, 다섯번째 연애도 했다. 쓰레기를 뒤적거리고 창문에서 방안을 훔쳐보던 변태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집에서 더 오래 살았을것이다. 동생은 그 집에서 살다가 결혼을 했고, 나는 대학원을 가게 되면서 근로자 대출을 받아 전세 8천만원의 2층 빌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연희동 집은 당시 내가 살아본 집 중에 가장 좋은 집이었다. 건물 입구 도어락이 있었고, 2층이었고, 방범창살이 방 곳곳에 있던 그래서 더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안전한 기분을 느끼며 잠들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시세보다 훨씬 싸게 그 집에서 살 수 있었던 건 그 건물이 아는 지인의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려 그 집에서 10년을 살았다. 지인은 10년 동안 한번도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정규직을 관둘 때 대출을 한번 더 받아 내쪽에서 먼저 전세금을 올리자고 제안한 적은 있었다. 나는 그 집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작은 회사를 차리게 되었고, 조카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걸 안온하고 평화로운 기분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연희동 집은 주거환경이 삶의 태도와 여유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피부로 느끼게 해 준 첫 집이었다. 침대, 소파, 옷장, 책장 등을 구매하며 집 다운 집을 꾸밀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연희동을 많이 사랑했고, 연희동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사를 마음 먹은 건 정말 작은 이유에서였다. ‘햇살이 필요해서’. 2층이라서 겨울엔 따듯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거실, 안방 모두 넓어서 정말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집이었으나 하나 단점이 있다면 볕이 들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새로 이사할 집은 무조건 환한 햇살이 보장되는 곳, 앞 뒤가 막혀있지 않은 확 트인 곳이어야 했다.
1월부터 오십여채 가까운 집들을 보러 다녔다. 낡고 좁은데 입지 때문에 턱 없이 금액이 높은 집들을 볼 때면 서울에서 내 집을 갖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좌절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증산역 근처에 있는 지금 집을 만났다. 처음 보자마자 확트인 전망이 마음에 들었고 엘레베이터가 있는 신축급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관리비가 싸고 주차공간도 널널하다는 장점 때문에 몇 주 고민하다가 이 집을 매매하기로 결정했다. 빌라 매매를 한다고 했을 때 투자 가치가 없다는 둥, 매매가 잘 안된다는 둥, 많은 주변의 반대가 있었지만 나는 굽히지 않았다. 동생은 수원 기흥 어딘가에 있는 아파트를 추천하며 향후 1억 이내의 차익을 볼 수 있는 아파트니 차라리 서울이 아니더라도 아파트를 구매하는게 어떻겠냐고 지치지 않고 추천했다. 언제 오를지 모르는 시세 때문에 친구도 지인도 없는 외딴 지역에 동떨어져 출퇴근 왕복 4시간의 고통을 겪느니 나는 투자를 포기하겠노라 이야기 했다. 나에게 집이란 ‘투자’의 개념의 아니라 ‘삶’ 그자체였다.
삶의 토대이자 근본이 되는 공간, 불안하고 쫓기고 기대하다 실망하는 그런 공간이 아닌 슬픔과 기쁨, 권태와 즐거움이 공존하는 공간,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운 사람이 함께 하는 그런 평범하고 편안한 공간이어야 했다. 아침에 눈을 떠 거실로 나오면 낯선 풍경에 현실을 되짚어 본다. 이렇게 환한 햇살과 맑은 하늘이 보이는 거실이라니…햇살이 환한 안방이라니…두 계단만 오르면 쓸 수 있는 넓은 옥상이라니…꿈은 아니겠지? 하고 말이다. 언젠가 또 몇 년이 흐르면 후회하는 마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 그때 아파트 샀어야 했나…누구는 시세차익을 몇 억을 올렸다던데…“ 그럴때를 대비해 이 글을 남긴다.
서울에서 50만원으로 시작해 나의 집을 갖기까지 몇 번의 집을 거쳤고, 몇 번을 만족하고 몇 번을 후회하고 또다시 몇 번을 감동했는지를 곱씹고 되짚으면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