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왜 생각하는 의자에 안 앉을까?

사유의 방,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순환', 장 줄리앙 푸스

지난 주말에 정금이와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다녀왔다. 예전부터 사유의 방이 올해 최고의 전시라고 꼽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얼렁뚱땅 왔는데 책자를 휘적휘적 넘기다가 '사유의 방'을 발견했다. 운이 좋았다.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보고 싶었던 전시를 볼 수 있다니, 나는 운이 좋은 놈이다. 발걸음을 빨리 하여 구석기 신석기시대를 가로질러 곧바로 삼국시대 6세기, 7세기로 갔다. 사유의 방에 발을 내딛자마자 반가사유상이 우리를 반겨줄 줄 알았으나 뭔 동영상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상의 제목은 '순환'.

나는 불교를 좋아한다. 윤회, 카르마, 나의 운명에 순응하기, 흘러가는 대로 살기... 순환적 세계관이 참 마음에 든다. 정금이와 나는 5분 길이의 동영상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영상은 끝없는 물질의 순환과 우주의 확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한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서 결국에는 광활한 우주 속 하나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작은 먼지 한 톨은 다시 순환을 하고 이와 같은 흐름을 반복한다. 무한히.

나의 고정관념으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는데, 동영상 감독은 프랑스 사람인 장 줄리앙 푸스였다. 왜 나는 당연히 한국인이 영상을 만들었겠거니 했을까. 따지고 보면 불교의 정신은 니체의 사상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기에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모든 인류가 지향하는 정신이니 프랑스 사람이 불교를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멀리서 반가사유상을 보기만 했는데도 압도되었고 순간적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순환'을 보고 그런 거 같다.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우리는 그저 우주의 하나의 점 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현실을 과연 어느 인간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허무함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특별한 존재이길 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몇 년 전부터 생각했다. 그럼에도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씁쓸한 상태로 반가사유상을 마주하자니 그냥 울고 싶었다. 진리를 통달한 현자에게 포옹받는 느낌이 들었다. 인생의 덧없음과 순환적 세계관을 5분 동안 이해하고 보는 반가사유상의 느낌은 단연코 영상을 보지 않은 사람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주황과 황토색 중간의 색과 검은색은 반가사유상을 보다 위엄 있게 만들었고 감상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보다 보니 반가사유상과 나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 갔다.

딱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슴슴히 미소 짓는 표정, 왜소해 보이지만 힘이 느껴지는 몸통과 팔, 편안하게 내딛고 있는 발. 공간이 주는 힘 때문일까, 반가사유상에 경외심이 아니라 경애심이 들었다. 전혀 무섭지 않았다. 사실 이런 불상은 무서울 법도 한데 오히려 편안했다. '어서 와, 그래 그래 나는 다 이해한다'하는 반가사유상의 표정을 보니 삶의 번뇌가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모든 대화의 기본은 경청인가 보다. 그래서 울었는지 모르겠다. 반가사유상은 그저 내 마음의 소리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온화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보자마자 울고 싶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올여름 파리에서도 이런 경험이 있다.


이번 연도 7월 한 달 동안 나는 혼자서 유럽여행에 다녀왔다. 일종의 도피 느낌으로다가 떠난 여행이었다. 두 번째 국가였던 파리에서 단연코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거는 모나리자였다. 루브르는 사람들로 붐볐고 처음에는 많은 인파를 보고 있자니 지쳐서 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오기로 보고야 만다 하는 마음으로 내 순서가 오기까지 기다렸다. 멀리서 보거나 매체를 통해서 봤을 때는 '저 눈썹 없는 여자 그림이 왜 유명해졌을까?' 했다.

이게 내 약삭빠른 심리적 기제가 작동해서인지 모르겠는데 앞 줄에서 가까이서 보니까 그 느낌은 마치...

드라마에서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주위의 사람들이나 소음은 흐리게 처리되고 두 사람만 보게 되는... 뭐 그런 느낌이 들었다. 분명 사람들로 북적여서 정신없던 루브르였는데 나와 모나리자만 남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썹 없는 여자가 짓는 표정이 참 편안했다. 묘한 표정이다. 웃는 거 같은데 그렇다고 화사한 느낌은 아니고 약간은 섬찟해 보인다. 이 기묘한 표정과 더불어 듬직해 보이는 풍채와 따뜻한 색감 덕분으로 나는 위로를 받았다. 이 여성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한 건 없고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압도되었고 눈물이 찔끔 나왔다. 동양인 여자애가 혼자 청승 떤다고 할까 봐 모나리자에서 조금 떨어진 모퉁이에서 눈물을 닦았지만.


반가사유상을 보면서 모나리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서양인들이 모나리자를 보고 왜 자랑스러워했는지 알겠다. 서양에는 모나리자가 있다면 동양에는 반가사유상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바로 표정에 있다. 편안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동양인 서양인 막론하고 인류라면 모두 저 경지에 도달하길 원하나 보다.


사유의 방에서 멍하니 홀리듯이 보고 있다 정금이와 나왔다.

사유의 방에서 사유는 안 하고 그냥 보기만 하다 나와서 사유를 하기 시작했다. 정금이와 이런저런 감상평을 서로 주고받았는데 역시 '흘러가는 대로, 운명대로 아등바등하지 않게 살기'가 중요하구나를 다시금 느꼈다. 특히 순수함이란 무엇인지, 순수함을 지키면서 사는 거의 중요성도 이야기 나눴다. 내가 생각하는 순수함이란 이상적 자아를 지키는 거다.

내가 지금까지 꺼내보는 소중한 쪽지. 위 글은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하고 잘 따랐던 화법과 작문 선생님께서 고3 올라가는 겨울에 써주신 거다. 이때는 의아했다. '늘 그 순수함을 간직한 채'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됐다. 19살의 나는 당연히 죽을 때까지 지금처럼(순수하게) 살아갈 건데 왜 늘 간직하라고 글에 적어주셨을까 궁금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순수함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고 선생님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누군가 그랬다. 어른이 된다는 건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거라고. 나는 많이 나이를 먹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그렇다 보니 이상적 자아가 내미는 인사는 흐린 눈 하고 현실적 자아와 악수를 더 많이 하고 있다. 내 이상적 자아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는 의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왜 어렸을 때는 잘만 앉게 했으면서 어른이 된 지금은 앉으라고 하지 않을까. 오히려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천천히 생각하고 이상적 자아와 대화를 해야 하는데..


사유의 방을 다녀오고 나서는 이상적 자아와 자주 놀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반가사유상의 저 편안한 표정이 자신의 업에 거스르는 삶을 살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았기에, 진리에 통달했기에 가능한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저 현자는 너무 현실에만 매몰되지 않고 진정 자기가 원하는 대로 흐뭇하게 살았으니까 왜소한 몸에도 불구하고 다부진 자세가 가능한 거다. 나도 반가사유상처럼 언제쯤 편안한 표정으로 인생을 관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가져가야 할 자세는 그의 온화한 표정 속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