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바람도 햇살도 아닌 무더위였다

by 짠맛 나는 파도

바람과 햇님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두고 내기를 했다.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외투를 벗기면 이기는 거야.

바람은 온힘을 다해 차가운 돌풍을 일으켰고, 그럴수록 나그네는 옷깃을 단단히 동여맸다.

햇님은 따뜻한 볕을 내리쬐었다. 결과는 햇님의 승리.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결국 차가운 바람이 아닌 따뜻한 햇살이었다는 아름다운 교훈.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람과 해> 이솝 우화이다.

초딩 시절의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 걍 더워서 벗은 거잖아.

따뜻함에 마음이 녹아내린 게 아니라

짜증나서 벗어던진 거 아닌가?이딴 게 왜 교훈임?

제일 중요한 나그네의 입장은 빠져있는데?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모든 말과, 훈계나 교훈 따위엔 팔짱끼고 “왜요?”부터 던졌던 나.

그 삐딱한 시니컬함은 지금도 유지 중이다.



나는 오늘 이 이솝 우화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다.

정확히는 우화의 창작자인 고대인 이솝 씨에게 묻는다.


1. 왜 햇살이 꼭 좋은 것, 바람은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 관념을 제시하는가?

2. 왜 해당 우화는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나누고, 바람은 실패자로만 묘사하는가.

3. 왜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고 강요하는 거냐. 그냥 좀 내비두면 안 되냐?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솝 씨 당신의 의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것을,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을.


하지만 여름에 내가 옷을 벗는 이유는 더워 죽을 것 같아서이지 따뜻해서가 아니다. 강한 태양 광선은 마음을 녹이는 게 아니라 사람 피부를 새까맣게 태워버린다.



한여름에 반가운 것은 되려 시원한 바람이고, 추운 겨울에야 달가운 것이 햇볕이다. 상황에 따라 바람과 태양의 역할은 얼마든지 뒤바뀌고, 언제 어디서나 따뜻함이 이기는 건 아니다. 바람도 태양도 적당히 서로를 보완해주는 존재들이 아닌가요? 왜 이분적으로 자르시냐구요. 바람도, 해가 없는 겨울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동의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차가움에도 데일 수 있지만 다정함에도 화상을 입을 수 있다. 따뜻함에 마음을 내어주기도 하지만 때로 무심함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정한 거리가 필요하기도 하고, 냉정한 조언으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도 있는 법이다.


어쨌든 인간이나 세상이나 더럽게 복잡한 존재라서 꼭 무엇 하나가 옳다고 말하는 방식의 교훈은 영 내 취향이 아니다.



현실에서 햇살 같은 사람들은 늘 속수무책으로 상처를 입고, 여기저기 데인 다음, 한겨울의 칼바람으로 변하게 된다. 감정적 번아웃이 찾아온 사람들에게도 따뜻함을 강요함이 마땅한가?


세상에는 도덕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배려가 마치 의무인 것처럼, 도덕을 권위적으로 강요하는 어른들이 너무 너무 싫었다. 내 다정함을 얕잡아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선의가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도 하였다.



내가 만일 바람과 해 우화를 다시 쓴다면


여름에는 바람이 나그네를 웃음 짓게 하고,

겨울에는 햇살이 나그네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다시 한여름의 태양이 나그네의 살갗을 태워버리고,

다시 한겨울의 북풍이 나그네를 얼어붙게 만들고,


그걸 나그네의 입장에서 1인칭의 시점으로


그 안에는 승패도, 선악도, 좋고 나쁨도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세상은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해가 되든 바람이 되든 무엇에도 장단이 다 있으니, 상황 따라 네 기준에 맞춰 알아서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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