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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밍 Jan 13. 2021

[Opinion] '그레이스'의 퀼트

드라마 <그레이스>(Alias Grace)

<그레이스>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Alias Grace)는 1840년대에 실제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토대로 한다. 1843년 7월, 토론토 근처 시골집에서 집주인 토머스 키니어와 그의 가정부이자 정부였던 낸시 몽고메리가 살해당한다. 부검 결과 낸시는 임신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범인은 그 집의 하녀 그레이스 마크스와 마구간 담담 하인이었던 제임스 맥더모트였다.


 살인 이후 그레이스와 제임스 맥더모트는 미국으로 도주했고, 언론은 이 둘을 연인으로 추측한다. 그레이스는 당시 16세 소녀로, 어리고 예뻤던 그는 당시 토론토 사회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치정과 살인은 누구나 탐할만한 자극적인 소재였고, 특히 그레이스에 대한 여론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고 한다. 키니어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제임스와 그레이스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그레이스에 대한 긍정적 여론과 탄원 덕분에 그는 종신형으로 감형된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레이스는 거의 30년간 정신병원과 교도소를 오가다가, 1872년 석방된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당시의 사료, 신문, 저서 등을 근거로, 그 공백들은 상상으로 채워나가며 그레이스의 삶을 좇는다. 해당 소설을 원작으로 한 Netflix와 CBC 드라마 시리즈 <그레이스>(2017)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텍스트를 성공적으로 스크린 위에 소환한다.


  

‘그레이스’라고 불리는  



 “I think of all the things that have been written about me. that I am an inhuman female demon, that I am an innocent victim of a blackguard, forced against my will and in danger of my own life, that I was too ignorant to know how to act and that to hang me would be judicial murder, that I am well decently dressed, that I robbed a dead woman to appear so, that I am of a sullen disposition with a quarrelsome temper, that I have the appearance of a person rather above my humble station, that I am a good girl with a pliable nature and no harm is told of me, that I am cunning and devious, that I am soft in the head and little better than an idiot. And I wonder, how can I be all these different things at once?”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인 동시에,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시리즈는 그레이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그에 대해 말해진 여러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잔인한 악마, 순진한 희생양 등, 자신의 표정을 ‘다른 사람에 의해 말해진 인물’과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떠다니는 말들에 대해 궁금해한다. 해당 오프닝 시퀀스는 시리즈를 전체를 관통한다. 여섯 개의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동안, 그레이스는 관객과 일종의 진실게임을 펼친다. 진짜 그레이스는 누구인가. 순진한 ‘성녀’일까, 교활한 ‘창녀’일까. 그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그레이스가 수감된 지 16년 후, 그의 사면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신과 의사 사이먼 조던이 초청된다. 그레이스는 살인 사건 부분의 기억은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말하며, 조던 박사는 정신 분석학적 상담 방식으로 이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


 조던 박사의 몇몇 질문을 필두로 그레이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생각하는 것과 조던 박사에게 말하는 것 사이에는 공백이 있다. 시리즈의 초반, 관객들은 그레이스와 조던 박사의 상담 장면 중간 삽입되는 이미지들과 그레이스의 내레이션을 통해 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레이스가 조던 박사에게 말하는 것들은 정제되어 있고 설득력 넘치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이야기(진실)를 온전히 내보이기보다는,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대로 남아 있으려 한다. 더 나아가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깃든 욕망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생존하려 한다.


 그레이스가 조던 박사에게 제시하는 내러티브는 낸시와 키니어의 죽음을 기억할 수 없다는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앞서 말했듯, 관객들은 불시에 삽입되는 이미지들의 파편과 내레이션 등을 통해 그레이스가 주장하는 ‘기억’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시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어떻게 그레이스의 ‘모르쇠’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분명 관객들은 조던 박사보다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던 박사와 유사한 위치에 놓인다.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목소리에 대해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전적으로 믿기에는 그레이스의 범죄 유무가 프레임 안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레이스가 살인을 하는 이미지 또한,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 관객은 그레이스가 살인을 하는 장면(샷)을 보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을 부인하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듣는다. 동시에 그레이스가 무고하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장면(샷)을 보지만, 이 또한 그레이스의 발화에 의해 무너지고 재건되기를 반복한다. 그레이스의 회고로 과거와 기억을 복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제시되는 이야기들은 완전한 ‘진실’이 아니다.


 그레이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전달하듯 사건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검열하고, 조작하기도 한다. 그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It might have happened(아마 그랬을지 모른다).”라고 말하거나 ”Today is the day I must talk about I must tell what I did or didn't do(오늘 해야 할 이야기는 제가 저질렀거나 그렇지 않은 일에 관한 거예요).”라고 말하는 등, 자신이 무죄인지 유죄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즉, 그레이스는 믿을 수 없는 화자다. 조던 박사와의 첫 만남에서 그레이스는 자신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그레이스의 발화를 전적으로 믿기 힘들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를 선택적으로 취해 재구성하고 프레임 바깥을 상상해보려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모든 증거들이 이중적이며 모호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그레이스가 제시하는 내러티브의 여정을 끝까지 따라가게 되고(이 시리즈를 일단 재생하면, 그 마지막을 보기까지 멈출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조던 박사는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려) 여성성이라는 수수께끼’에 직면한다.


 이미 남에 의해 규정된 모습만을 말하고자 하는 그레이스와의 상담은 조던 박사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조던 박사는 그레이스를 관찰하며 징후와 단서를 얻어내려고 하지만, 타인이 욕망하는 모습을 스스로 창조해내어 그를 역이용하는 그레이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즉, 조던 박사는 그레이스를 성녀 혹은 창녀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안에서 포착할 수 없다. 조던 박사는 그레이스를 ‘순수한 성녀’로, 때로는 ‘타락한 창녀’로 바라보며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결과적으로 조던 박사는 실패한다. 조던 박사의 정신분석이 아니라, 신경 최면을 통해 ‘진실’이 드러난다. 그레이스가 다른 사람의 의식을 가지고 살인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확실하지 않다. 그레이스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정말 다른 이의 인격체로 전환된 것인지 모호하다. 1872년 사면되어 바깥세상에서의 삶에서도 그레이스는 비슷한 ‘말하기’를 이어나간다. 남편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살짝 바꿔서 말한다. “선의의 거짓말은 평화로운 삶을 위해 치러야 할 조그만 대가”이기 때문이다.


 원제인 “Alias Grace”는 ‘일명 그레이스라고 불리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드라마는 관객에게 ‘진정한 그레이스’를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보여줬을 수도 있지만 확신하기 어렵다. 판단은 우리의 몫이지만, 진실은 오롯이 그레이스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다. 과연 ‘진실’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그레이스’라는 기표 아래 머무르는 ‘진실’들은 유동적이다. 발화자인 그레이스가 타인(대상)과 어떤 관계에 놓여있냐에 따라 ‘그레이스’는 달라진다. 극 중 그레이스의 말마따나, “죄는 제가 한 일이 아니라 타인이 저에게 한 일에 따라 결정”된다.


 그레이스의 인생은 말하고, 듣고, 재단하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것이었다. 진실해 보였던 청자 조던 박사 또한, '주체(그레이스)'의 발화를 온전히 듣는 '객체'는 아니다. 그레이스가 말해주는 삶은 조던 박사의 욕망에서 추동한다. 재판 당시 그레이스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그레이스를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와 동일선상에 두며 말한다. “셰에라자드가 거짓말을 했습니까? 그 여자 처지에서는 아니죠. 사실 그 여자가 한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이라는 잣대로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 그레이스 마크스도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말만 하고 있을 겁니다.” 셰에라자드는 천 하룻밤 동안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목적은 목숨이다. 그레이스도 같다. 이민자, 하층민, 하인, 범죄자, 그리고 '여성'인 그레이스의 발언은 타인의 욕망에 기댈 때에만 간신히 입 밖으로 꺼냄을 허락받았고, 그렇게 살아남았다.


 해당 시리즈는 그레이스가 유죄인가 무죄인가에 대한 ‘진실’을 밝혀나가지 않는다. 어차피 진실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어 왔다. 그저 그레이스의 목소리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읊조린다. 자신의 목소리로 복원된 그레이스는 기존의 담론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존재다. 이는 여성의 이분화된 상을 목격하게 함과 동시에 그 패러다임을 갈기갈기 찢어 해체한다. <그레이스>는 이분법적 여성상에서 범주화될 수 없는, 모호하기 때문에 전복적인 그레이스의 초상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시선과 목소리의 전복



 드라마 <그레이스>를 감히 한 마디로 표현해보자면, ‘그레이스의 내러티브 장악’이다. 조던 박사와의 상담 초기, 그레이스는 자신의 이야기에 적극적이지 못하다. 지난 15년간 말을 많이 하지 않아 이야기를 시작하기 어려워하며, 박사님이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하고 싶은 말 또한 별로 없다.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살인 사건 이후, 재판을 거치면서 그레이스의 발화는 철저히 통제받고 왜곡되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경험했고,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변호사와 기자들, 의사들은 자신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여 거짓말을 한다. 조던 박사와의 첫 만남도 비슷한 맥락에서 시작한다. 피상담자인 그레이스는 조던 박사의 관찰을 통해 해석되고, 글로 쓰일 대상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조던 박사와의 상담에서 그레이스는 ‘일단’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상정된다. 그레이스는 말문을 열고, 남들이 규정한 자신에 대한 담론을 흔들어 놓기 시작한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그레이스는 점차 조던 박사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며 대화의 주도권을 쥔다. 후반부의 그레이스는 조던 박사가 부재중일 때도 자기 이야기를 구성해나간다. “박사님이 오늘 오시지 않아서 저 혼자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박사님이 돌아오시면 말할 수 있게 준비하는 거죠. 물론 제임스 맥더못의 입장도 있어요.”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레이스는 해석 불가능한 존재로 남는다. 이성적인 해석자(관찰자)였던 조던 박사는 이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면서 그레이스의 이야기에 감정적으로 휘말리게 된다.


 “그레이스가 무슨 말을 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분명히 속삭임(whisper)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한밤중에 마주친 남자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와 같은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조던 박사는 점점 상담자로서의 능력을 상실한다. 상담이 진행될수록, 조던 박사의 몸을 단단하게 감쌌던 옷들은 헐거워지고(말아 올린 소매, 풀어진 단추, 입지 않는 재킷 등), 단정했던 머리칼 또한 흐트러진다. 초반의 조던 박사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들었던 반면, 마지막에는 그레이스와 (물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앉아 이야기하며 ‘적정 거리’를 상실한다.  



 그레이스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말하기와 쓰기의 주종관계가 뒤바뀐다. 사면 이후 그레이스는 조던 박사에게 편지를 ‘쓴다’. 이때 조던 박사는 말하기와 쓰기의 능력을 잃은 상태다. 조던 박사는 그레이스를 상담하면서 자신의 과학적 지식에 좌절감을 느낀다. 이후 남북전쟁에 참전한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언어 장애를 안고 누워있다. 누워있는 아들(조던 박사)에게 그의 어머니는 그레이스가 보내온 편지를 읽어준다.


 이야기(목소리)의 힘을 얻은 그레이스는 시선까지 통제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가부장적 ‘응시’가 어떤 건지 그레이스는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그에 맞춰 자신을 연기하며, 기꺼이 응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하지만, 그레이스의 시선은 묘하게 비껴나가 있다. 조던 박사와 그레이스의 상담 장면에서 관객이 시선 일치를 시키는 대상은 조던 박사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조던 박사와 유사한 위치에서 그레이스를 응시한다. 카메라(관객)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그레이스 또한, ‘진짜’가 아니라 거울 속 모습이다.  



 오프닝 시퀀스와 조응하는 엔딩에서야 그레이스는 ‘진짜로’ 카메라와 시선을 마주하며, 관객의 시선을 맞받아친다. 마지막에서야 그레이스는 자신의 말을 듣는 남편의 모습과, 그에서 연상되는 조던 박사의 모습을 묘사한다. 여기에서 조던 박사는 응시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그(남편 제이미)는 내가 겪은 고통을 상상하는 걸 좋아해요. 동화를 듣는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죠.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박사님이 생각나요. 박사님도 제이미처럼 열심히 제 인생의 고통을 들어주셨죠. 뺨이 빨개지셨고 만약 박사님이 개 같은 귀를 가졌다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혀를 내밀었을 거예요. 덤불 속에서 꿩이라도 발견한 것처럼요. 남편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살짝 바꿔서 말해요. 그러면 제가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요.”


 그레이스는 침묵에서 시작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마지막에는 글을 써 내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그레이스가 ‘응시’의 메커니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에 그레이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시선의 힘까지 얻어, 결국에는 내러티브를 전복하고 장악한다.


  

여성들의 삶으로 이어 붙인 ‘퀼트’



 해당 시리즈에서 ‘퀼트’는 그레이스의 내러티브를 추동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조던 박사와의 상담은 그레이스가 퀼트를 짜면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퀼트는 여성의 ‘사소한 몫’이었다. 그레이스는 젠더, 계급, 인종적 위계에서 주변화된 하류층 여성이다. 그레이스의 삶에서 그를 지나간 이들 또한 하류층 여성, 메리 휘트니와 낸시 몽고메리다. 이들의 삶은 퀼트 짜기와 동반된 그레이스의 말하기를 통해서 다시 짜이고, 이곳에 소환된다.


 그레이스와 메리 그리고 낸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앞서 언급하지 않았던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잠깐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레이스는 어린 시절 아일랜드에서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건너온다. 바다를 건너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죽고, 이후 그레이스는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다. 돈을 벌기 위해 그레이스는 토론토의 한 집에 하녀로 들어가고, 메리를 만난다. 장난기 많은 메리는 그레이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을 선사해주었고, 저항(평등)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솔직한 인물이었기에 그레이스에게 세상에 대한 비판과 주체성을 심어준다. 메리의 죽음 이후 그레이스는 키니어의 집의 하인으로 들어가, 그곳의 가정부 낸시를 만난다.


 하류층 여성들은 구조적 폭력에 취약한 위치다. 메리는 결혼을 약속받고 주인댁의 아들과 관계를 맺지만, 임신한 사실을 남자에게 알리자 5달러를 받고 버림받는다. 이 과정에서 의심과 비난, 협박은 당연한 몫으로 따라온다. 메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불법 낙태수술뿐이다. 낙후된 시설과 기술로,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했기에 메리는 결국 죽는다. 메리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 입을 열지 않고,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죽는다. 메리의 죽음은 단순 열병으로 가려져 사실이 은폐되고, 그대로 종식된다.


 낸시는 집주인의 가정부이자 정부로, 집주인 키니어에게 버려질 경우 자신의 생사가 불투명해진다. 때문에 그레이스가 그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경계한다. 그레이스는 안주인 행세를 하는 낸시가 불편하다. 그러다 그레이스는 낸시의 임신 증상을 발견하고 그가 집주인의 정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때문에 그레이스와 낸시는 메리와 같은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후 (진실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 또한 벌어진다.


 후반부에 신경 최면을 통해 그레이스가 ‘메리’의 의식을 가지고 살인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레이스는 메리의 죽음 이후 “Let me in(들여보내 줘).”라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들었고, 이는 이중인격의 전조로 제시된다. 수면상태에 빠진 그레이스는 메리의 목소리로 말한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니 낸시는 죽었어야 했고, 살인은 자신(메리)이 저질렀다고. 그리고 이제 낸시는 자신의 친구이며, 모든 걸 다 이해한다고 말한다. 또한 지금 낸시는 자신과 사이좋게 나눠 쓰려한다고 말한다.


 이 목소리가 거짓이든 진실이든, 중요한 건 그레이스와 메리, 낸시가 본질적으로 공통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필연적으로 폭력의 연속선상에 갇혀있다. 메리와 낸시는 구조와 위계 앞에서 무력하다. 상류층 남성에게 결혼을 약속받고 결국 버려져 낙태 후 죽음을 맞이하는 메리, 상류층 남성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만 결국 정부의 위치에 머물며 자신의 위치를 대신할 이들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는 낸시. 그레이스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마주할 운명을 미리 볼 수 있었다.


 다만 달랐던 건, 그레이스는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타인의 욕망에 맞춰 그를 보여주는데 능숙했고 메리와 낸시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여성은 '죽어 마땅했기에' 죽었다. 앞서 여러 번 말했듯, 그레이스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다. 왜 누구는 죽어 마땅했고, 그 척박함 가운데에서 생존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이에 대해 보고, 듣고, 말하며 쓸 수 있는 존재는 어떤 권력을 가졌는가. 그레이스는 이러한 이야기를 던져놓고, 마지막에는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며 되묻는다.  



 자유로워진 삶 속에서, 그레이스는 자신을 위해 첫 누비이불을 만든다. ‘천국의 나무’ 무늬를 약간 변형한 퀼트다. 천국의 나무의 가장자리에 서로 뒤엉킨 뱀들을 넣고, 하얀 바탕에 나무 한 그루만 크게 넣는다. 나무는 삼각형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고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나무를 이루는 삼각형 조각들 중에서, 세 개만은 다른 색이다. 하나는 빨간색으로 메리의 페티코트를 자른 것이고, 또 하나는 누르스름한 색으로 그레이스의 교도소 잠옷을 자른 거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연분홍색 무명천으로 그레이스가 키니어의 집에 처음 간 날 낸시가 입고 있었던 옷이면서, 그레이스가 도망칠 때 입고 있었던 드레스를 자른 것이다. 그리고서 그레이스는 말한다. “그럼 우리는 모두 함께할 수 있을 거예요.” 퀼트의 조각조각처럼 파편화된 이들의 이야기는 그레이스의 말하기로 인해 하나로 완성된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삶을 말해나가며, 다른 여성들의 삶을 함께 엮어낸다.


 여전히 '그레이스'에 대한 진실은 알 수 없다. ‘진실’을 원하는 우리에게 그레이스는 정면으로 되묻고, 선언한다. "어떤 진실을 원했나요? 기꺼이 당신이 원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로 활동하며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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