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알바를 이렇게 계속하게 될 줄이야

쿠린이에서 고인 물이 되기까지

by 지구의 이방인

한국에 오게 되면서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일은 쿠팡에서 일해보는 것이었다. 힘들기로 나름 악명이 높은 쿠팡 알바 후기 글들을 읽으면서 늙어가는 나의 몸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래? 얼마나 힘든지 한 번 해볼까?'라는 도전 의식도 있었던 것 같다. 독일에 있을 때 패션 회사에서 일했었는데 한 번은 물류 창고에 인원이 부족해 자원해서 지원 업무를 일주일 동안 나간 적이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물류 창고에 도착해 상품에 라벨을 붙이는 무한반복 업무를 일주일 동안 했었다. 그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몸은 정말 힘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신만큼은 맑아지고 건강해지는 경험을 했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 나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는데, 몸은 편하지만 정신이 피곤한 것보다 몸이 피곤하지만 정신은 편한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무언가 복잡 미묘하고 알 수 없는 속내 같은 것이 없었다. 처음엔 본사에서 온 나를 살짝 경계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그 경계는 풀어졌고, 마지막 날이 되자 나보고 일을 잘한다며 또 오라고 활짝 웃으며 나를 안아주며 보내주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난 후 한국에 돌아와 시작한 쿠팡 알바가 어느덧 1년을 훌쩍 넘겼다. 어쩌면 나는 몸을 쓰는 일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물류창고에서의 일주일. 아이스크림 데이도 있었다.


쿠팡에 처음 갔던 날은 살짝 긴장을 했더랬다. 생각보다 다 쌀쌀한 날씨에, 생각보다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나야 해 퉁퉁 부은 얼굴로 버스를 탔는데, 익숙하게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은 자리를 잡고 바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난 어디로 실려가는지 모르는 채 버스 안에서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후 버스는 센터에 도착했고 나는 우르르 내려 어디론가 익숙하고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어리바리하게 두리번거리며 헤매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속사포처럼 설명을 쏟아내고는 가 버렸다(아마 HR 직원이었겠지).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나처럼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물어물어 어찌어찌 체크인을 마치고 교육장에 가서 교육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진 않았고 다행히 첫 날 만난 관리자와 PS 사원은 매우 친절해 쿠팡 알바에 대한 첫인상이 나쁘진 않았다. 게다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점심밥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노곤노곤한 몸과 함께 '아 오늘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살았다'라는 기분이 들면서 무언가 충족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공부와 과제를 해야 했던 나에게 쿠팡 알바는 어느새 삶의 활력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가서 일을 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면서 머릿속이 맑아졌고 몸을 계속 움직이면서 쓰게 되니 계속 가만히 앉아있어 굳어지는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주중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몸을 쉬어주고 주말에는 쿠팡에 가서 일을 하면서 머리를 쉬어주니 이보다 밸런스가 더 잘 맞을 순 없었다. 셔틀을 타고 서울을 벗어나니 드라이브를 하러 가는 기분이었고 일하러 가는 게 나에게는 힐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쿠팡 아르바이트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진 않는데 나는 일하는 게 재미있고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계약직으로 일해보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고, 아직 계약직도 아닌데 관리자 되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지게차 사원님들이 믹스커피를 건네주면서 "지게차 자격증 따서 계약직 들어와, 돈 더 받고 좋잖아"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넉살 좋은 척 "그럴까요?"라고 하며 달달한 믹스커피를 같이 마시곤 했다. 이곳에서 일하니 믹스커피와 간식은 필수였다. 오후 3~4시쯤 되면 달달한 믹스커피가 그렇게 당길 수가 없었다. 간식도 처음엔 안 가지고 다녔는데 오후가 되면 당 충전이 필요하기도 하고 사람들과 나눠먹는 재미가 또 있어서 점점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3톤 미만 지게차 자격증도 후닥닥 따버렸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왔고, 스쳐갔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중에 기억에 남는 한 분이 있다. 한 센터에서 계속 일하다 보니 나는 소위 '고인 물'이 되어서 신규 단기 사원님들을 도와주기도 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단기로 일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잘 모르는 게 있어도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물어볼 게 있거나 문제가 생겨도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 분은 나에게 와서 계속 물어보면서 일을 하는데 뭔가 빠릿빠릿하고 똘똘한 느낌이 드는 분이었다. 첫날은 그렇게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 지나갔는데 다음번에 그분이 또 일하러 오셨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오전 일을 끝내고 점심을 같이 먹는데 어쩌다 보니 하는 일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이 약간 모호하게 대답을 하면서 "회사에서 하라고 하면 그 일을 하는데, 이번에는 이쪽 분야에서 일하라고 해서 오게 됐어요"라고 하는데 순간 '배우신가?' 하는 느낌이 확 왔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혹시 배우세요?"라고 물어보니 맞다고 했다. 너무 신기해서 우와우와 하고 있으니 수줍어하며 "그런데 아직 단역 배우예요"라고 대답했다. 비록 지금은 단역 배우일지라도 이렇게 직접 물류 창고에 와서 맡은 배역에 대한 경험을 해 보려는 마음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맡은 역할이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역할이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하면서 출연하는 드라마에 대해 조심스럽게 얘기했는데 그 드라마가 바로 지금 방영 중인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였다. 그때만 해도 캐스팅 정보가 류승룡 배우, 명세빈 배우밖에 없었고 아마도 촬영이 들어가기 전이었던 듯했다.

살다 보면 신기하게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얘기가 끊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분과도 그랬는데, 한 번 얘기를 시작하니 둘 다 입이 터져서 계속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들이 둘이 원래 알던 사이었냐고 물어볼 정도로. 그 후로 그분은 촬영에 들어갔는지 다시 오진 않았고 나도 다른 센터로 옮기게 되어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이제 시작이라고, 그런데 쉽지 않은 길인 것 같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 나는 '서울 자기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아니 마냥 재미있게만 볼 수는 없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그분과의 에피소드 덕분인지 내게 뭔가 각별함을 주는 드라마이다. 가는 길이 쉽지 않을지라도, 혹시 다른 방향으로 바꿨을지라도, 앞에 놓인 그 길을 뚜벅뚜벅 잘 걸어가고 계시기를 마음 깊이 응원한다.


밥먹으러 저렇게 뛰어가진 않지만 반찬이 없을 때가 진짜 있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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