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비극은 기원전 6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서 시작되었으며, 보통 태생이 고귀한 주인공, 즉 왕이나 유명한 전사가 성공을 거두며 찬사를 받다가 자신이 저지를 잘못 때문에 파멸이나 수치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간다.
- 알랭드 보통, 『불안』
해준 :
패턴을 좀 알고 싶은데요.
최연소 경감이자 경찰서 에이스 형사 장해준(박해일). 그가 맡게 된 구소산 변사 사건. 수사 과정에서 해준의 앞에 등장한 피해자 기도수의 아내 송서래(탕웨이). 서래를 처음 대면하자마자 해준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 해준은 파멸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간다.
해준 :
나도 언제나 똑바로 보려고 노력해요.
모든 사건 현장에서 해준은 항상 눈에 인공 눈물을 넣는다. 형사로서 범인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똑바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 해준이 최연소 경감이자 에이스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구소산 변사 사건만은 똑바로 보지 못한다. 서래가 빚어내는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탓일까. 송서래가 범인임을 알려주는 수많은 증거와 동료 형사 수완(고경표)의 타당한 의문 제기에도, 오히려 해준은 서래를 변호하기에만 급급하다. 심지어 홀로 웃고 있는 서래를 보며 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준은 정말 못 본 것일까. 오히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보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 가깝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 될 줄 모른 체.
서래 :
기쁜가요?
결국 구소산 사건은 기도수의 자살로 종결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해준은 서래와 만남을 가진다.
평소 불면증으로 잠들지 못하던 해준은 서래로 인해 편히 잠들게 되고, 아이스크림으로만 끼니를 때우던 서래는 해준이 직접 차려주는 음식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된다. 그렇게 해준과 서래는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해준 :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역설적으로 해준은 서래와 가까워지면서 서래가 남편 기도수를 살인한 범인이었음을 깨닫는다. 진실을 알게 된 해준은 서래에게 큰 배신감을 느낀다. 서래가 살인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사로서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은 해준. 그럼에도 해준은 사실을 바로잡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대신 스스로가 무너지고 깨어지는 것. 즉, 붕괴되는 것을 선택한다. 결정적인 증거인 서래의 휴대폰을 서래에게 넘겨주고, 휴대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당부하며 해준은 서래를 떠난다.
해준 :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서래: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를 떠나 안개가 자욱한 도시 이포로 전근을 간 해준. 그의 앞에 서래가 다시 등장하고, 서래는 두 번째 남편 임호신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서 형사 해준을 대면한다. 이에 해준은 크게 불쾌해한다. 반면에 서래는 오히려 해준을 반가워한다.
해준은 임호신을 살해한 범인이 당연히 서래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서래와 관련된 두 번째 살인 사건에서 해준은 또다시 똑바로 보지 못하고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진실은, 역설적으로 서래가 해준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제야 해준은 서래를 추적하지만, 서래는 이미 바다로 떠난 이후였다.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 김승옥, <무진기행>
서래 :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의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자신을 쫓는 해준에게 서래는 이전에 해준이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었음을 말한다. 이에 의아해하는 해준에게 서래는 자신의 모국어인 중국어로 사랑을 고백한다. 한국어로 알려달라는 해준의 요구에 서래는 이전에 해준이 자신에게 했던 말로 답한다.
서래 :
해준 씨.
그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것이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음을. 그래서 서래가 한국어로 전한 사랑 고백에도 그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서래 :
나는 해준 씨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바다를 좋아하는 서래는 바다처럼 점차 해준에게 스며들고, 마침내 스스로를 바다에 묻어버린다. 그것이 해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붕괴를 가져오는 것을 알면서도, 서래는 해준에게 미결사건으로 남아 영원히 기억되고자 한다. 헤어짐으로써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것이 서래의 헤어질 결심이었던 것이다.
서래가 묻힌 바다 위에서 해준은 절규한다. 그리고 이전에 서래와 헤어질 때 녹취된 자신의 음성을 들으며 이내 깨닫는다. 자신이 서래에게 사랑을 고백했었음을 그리고 서래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했음을.
이번에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 해준은 허탈하게 웃는다. 그리고 신발끈을 다시 묶으며 서래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짙은 안개와 거친 파도만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맞은 해준을 감싸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예술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실패자가 우리에게 고귀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자질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 그들의 창조자나 기록자가 그렇게 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특히 처음 생겨날 때부터 위대한 실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조롱이나 심판은 삼간 특별한 예술 형식이 있다.
이 형식의 장점은 파국을 맞이한 사람들―불명예스러운 정치가, 살인자, 파산자, 감정적으로 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 받는 일은 드물다.
비극은 죄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 낸다.
- 알랭드 보통, 『불안』
흔히들 사랑을 좋은 것으로 여기곤 한다. 그러나 해준의 경우처럼 때로는 사랑은 그저 비극에 불과하다.
사랑은 산과 바다에서 피어나는 안개처럼 시야를 흐리게 하고, 이는 결국 판단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해준은 늘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실제로도 그래서 성공해 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서래에게는 항상 평정심을 잃어버린다.
어쩌면 해준은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콩깍지가 씐 것일 수도 있고, 사랑에 대한 배신감에 분노에 휩싸인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사랑은 결국 해준에게 파멸을 불러일으켰다.
한 번 깨어진 균형은 결코 원상태로 회복될 수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바다에 묻어버린 서래. 그곳에 홀로 남겨진 해준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