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악보를 들고 유럽을 여행하다.
처음 보는 외국인과 단 5분 안에 친해져야 하는 상황이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현금다발? 경찰 수사를 받을 수 있다.
매력적인 미소? 선택받은 자들만의 혜택이지
시원한 맥주 한 병? 나쁘지 않다. '5분'이라는 시간제한만 없다면.
내 선택은 ‘노래’, 정확히 말해서 그 나라의 언어로 만들어진 ‘유행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눈 파랗고 이국적으로 생긴 외국인이 뜬금없이 조용필의 노래를 부른다고 상상해 보자. 잠깐의 정적. 이내 떠오르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미소. 그리고 후렴쯤 가면 작든 크든 후렴을 따라 부르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여기까지 통상적인 노래의 1절 기준으로 2분. 어디서 이 노래를 배운 거냐라는 후속 질문에 답해주는데 1분. 3분 안에 유럽 각지의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지도 대신 악보를 들고 떠난 여행이라고나 할까. 전역 직후 스물넷 까까머리가 가진 잔고는 이백만 원 정도였으나, 노래로 집과 자동차를 구해서 6개월간 유럽을 돌아다녔다. SNS를 통해 각 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유행하는 노래를 묻고, 반복해서 그 노래를 들으며 한글로 가사를 옮겨적었다. 그리고 혼자서 길을 걷거나 차를 기다릴 때마다 계속해서 노래를 되뇌면서 1절 정도는 외우기 위해 노력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하여 동쪽 끝 터키 이스탄불까지 오는 동안, 내 악보에는 20개 언어로 만들어진 25개 국가의 노래가 기록되었다.
물론 노래를 즐기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악보에 수집된 노래가 8개를 넘었을 무렵 –아마 이탈리아에서 슬로베니아로 건너갔을 때쯤- 노래를 모으면서 여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또 하나의 카드가 되어주었다. 당시 나는 ‘카우치서핑’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다음으로 여행할 도시의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잠자리를 구했는데, 2%도 안 되던 성공률이 70%에 육박할 정도였다. 한 번은 휴게소에서 지나가던 운전자와 친해져서 200km 떨어진 도시에 있는 그의 자식 집에서 잠을 얻어 자기도 했다.
악보를 들고 떠난 여행은 20대 내내 나의 자부심이었다. 그때는 주위의 모두가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친구들에겐 부럽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고, 어른들에겐 내 가능성을 넌지시 보여줄 수 있는 소재였다. ‘나만의 장점이 뭘까’로 고민하던 나에겐 명쾌한 해답이었다.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으로 더 많은 여행 기회를 만들었다. 외국인과의 친화력을 장점으로 가이드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해외 전시회에 통역 지원을 나갔다. 글로 쓰지 않았지만 매일 떠들어대니 몇 년 전 여행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30대가 되자 시각이 달라졌다. 또래든 어른이든. ‘과거에 어떤 멋진 경험을 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대화 소재가 아니고,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친구들은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어른들은 언제 자리 잡을지를 궁금해했다. 취미 이야기를 해도 장기간의 여행보다는 운동, 재테크와 같이 ‘서울을 떠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꺼내볼 일이 없으니 생생하던 기억도 빛을 잃어갔다. 그것은 ‘자리를 잡은’ 지금 기준으로도 꽤 두렵고 먹먹한 일이었다.
말 대신 글로 기록을 남기려는 시도도 몇 번이고 해봤다. 인스타그램, 블로그, 브런치... 심지어는 오프라인 모임도 나가봤다. 그러나 4주 정도 글을 쓰고 나면 몇 개월을 쉬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첫 단추’에 대한 이상한 강박 때문이었다. 기억은 바래졌으나 자부심은 남아있었고, 20대의 ‘위대한 경험’은 그에 맞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수준이어야 했다. 하지만 문장력의 부족을 느끼며 번번히 발행하지 못하고 한글 파일로만 글을 저장 해갔다.
다시 쓸 용기를 준 것은 문장력이 아니라 가창력이었다. ‘서울을 떠나지 않고’할 수 있는 보컬학원에 재미를 붙인 게 뜻밖의 도움이 됐다. 힘을 빼고, 리듬을 타고, 듣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불러라. 사소한 것 하나하나 기록하던 버릇을 버리고, 글쓰는 시간을 정해 루틴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조언- 노래를 할 때 스스로 기분을 풀기 위해 부르지 말고, 듣는 사람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할지를 고민하라고 했다. 글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기왕 노래 덕분에 펜을 들었으니, 음악 앨범과 같은 에세이를 남겨보려 한다. 한 편 한 편 따로 들어도 되고, 이어서 들어볼 수도 있는 구조. 4분 정도면 읽을 수 있는 간결한 분량. 유럽 각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사의 감정, 그리고 그와 유사한 내 경험을 섞어 차곡차곡 곡을 만들 것이다. 실험적인 시도도 하고, 가끔은 들었던 이야기를 피처링으로 쓰기도 하면서. 노래로 시작한 여행을 노래의 형태로 마무리하고 기록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