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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 Jun 22. 2023

결투를 시작하지.

우리들은 111(1학년 11반)




1학년 선생님들의 고민 중 하나는 아이들이 앞다투어 tmi를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아빠는 수염을 잘 안 깎아서 얼굴이 따갑다는 것, 엄마가 다이어트 중이라는 것, 이번 주에 할머니 생신이라서 엄마가 노래를 하라고 했는데 하기 싫다는 것, 동생이 유치원을 안 가려고 해서 혼났다는 것, 엄마는 자신에게는 화를 내면서 전화받을 때는 "여보세요옹~" 한다는 것 등 28명의 아이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내가 긴장을 늦추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tmi 공격을 시작한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내게 오는 빈도가 점차 줄어드는데 그럼에도 꼭 한 번씩은 엄청난 강자를 만난다. 그녀는 기회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회를 만든다. 쉬는 시간이면 쌓여있는 메시지도 처리해야 하고, 다음 수업 준비도 해야 하고, 화장실도 빨리 다녀오고 싶고, 아이들 안전도 신경 쓰고, 싸우고 우는 놈들 즉결심판도 해야 해서 10분이 1분처럼 느껴지는데 그녀는 초연하고 꼿꼿하게 오늘도 내 앞에 와서 수다노래를 시작한다.


"선생님 제가 어제 구름공원 놀이터에 갔는데요, 거기에서 빈이를 만났다요? 빈이는 5반인데요. 저랑 유치원 때 같은 반이었어요. 원래는 피아노 학원에 빈이랑 같이 다녔었는데 빈이가 바이올린 배운다고 학원 끊어서 이제는 저만 다니거든요? 근데 어제 누가 왔는지 아세요? 선생님도 아는 애예요. 누구게요? 맞춰보세요. 우리 반 혁이가 왔다요? 근데 혁이는 아직 피아노를 치지는 못하고 선생님이랑 기초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저는 지금 오른손은 잘 치는데 왼 손은 어려워요. 그래서 엄마가 집에 피아노를 사줬다요?" (그 후로 5분 생략)


2학년만 되어도 안 그러는데 1학년에는 유난히 자신의 특성이 강해서 아무리 타이르고 설득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걸 매일같이 반복하는 아이들이 있다.


나는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경험을 많이 마련해 주고, 그 아이와 결이 잘 맞는 친구와 대화할 기회도 많이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내게 오는 경우가 아니었다. 부모님과의 애착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쉬는 시간은 다음 수업 시간을 준비하는 시간이지, 선생님과 일대일로 대화하는 시간이 아니라고도 말해주고, 선생님이 다른 친구와 대화하고 있을 때는 끼어들거나 앞으로 나오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기도 했다. 어떤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칠판에 큰 귀를 그려놓고 그 귀에 대고 말을 하면 선생님이 듣는 거니까 그 귀에 대고 말을 해보라고도 했다. 그녀는 내가 유치원생인 줄 아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 새로운 보드게임을 꺼내며 제일 먼저 친구들과 해볼 수 있는 기회도 주었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오직 나와의 대화만을 고집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막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구나~ 그럼 이제 선생님 얘기 한 번 들어볼래? 선생님도 어렸을 때 피아노 엄청 좋아했어! 선생님은 어렸을 때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었는데 선생님 엄마가 선생님 동생은 바이올린을 배우게 해 주셨는데 선생님은 피아노를 계속 치라고 하셨어. 그래서 피아노를 계속 쳤는데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나중에는 너무 어려운 거야. 그 어려운걸 계속 참고 쳤어야 하는데 선생님은 어려운 건 연습을 안 하고 쉬운 노래만 계속 쳤거든?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재미가 없더라고. 그래도 그때 연습했던 노래들이 지금도 다 생각이 나. 그때 선생님이 어떤 노래를 좋아했게?^^"


"네? 모르겠어요."

"한번 맞춰봐^^ 선생님은 어떤 노래를 좋아했을까?"  

"모르겠어요."

"한 번만 생각해 봐^^ 선생님은 어떤 동요를 여러 번 연습했을까?"

"..."

"선생님은 '나의 살던 고향은'을 엄청 좋아했어. 선생님이 시골에 살았던 건 아니지만 그 노래를 들으면...(5분 생략)"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나의 반격에 놀란 그녀는 황급히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오늘 끝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2교시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다시 그녀를 부른다.


"혹시 화장실 다녀오고 싶니? 안 가도 괜찮아? 그래. 그럼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할까? 물 싸왔지? 물 한번 마셔. (나는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목 안 말라? 학교가 아직 익숙하지 않다 보니까 지금 내가 목이 마른 지 안 마른 지 자신의 감각에 귀를 못 기울여서 내가 물이 마시고 싶은지 모를 수도 있어. 물 한 모금만 마셔볼까? 싫어? 그래. 그러면 지금은 안 마셔도 되는데, 혹시 쉬는 시간에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생각을 해보고 내가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면 물을 꼭 마셔. 알겠지? 선생님은 살아보겠다고 이 와중에 녹차를 마셔. 녹차를 마시면 건강에 좋거든. 녹차는 어디에 좋냐면..." (3분 생략)   


그녀는 두 번 정도 자신의 수다 반격을 시도했지만 나는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녹차의 효용성과 수분 섭취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행히도 놀이시간이라 쉬는 시간이 긴 타임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다리가 아플 것 같으니 의자에 앉으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기어코 거절하길래 내가 승기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의 말에 취해 다리 아픈 것도 못 느낄 것 같아서 이번에는 내가 기어코 의자에 앉혀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아이의 지친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만 더 했다간 아동학대가 남의 말이 아닐 것 같다. 내가 말을 마무리하자 아이는 벌떡 일어나 번개처럼 친구들에게 가 버린다.  

 


나는 오늘 뿌리를 뽑고 싶다. 나는 이미 한 달을 당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집안 사정과 부모님의 관계, 학원 스케줄과 유치원 생활의 고단함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3교시 쉬는 시간이 시작하자마자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종이치자 마자 벌떡 일어나더니 화장실을 가는지 교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천천히 물을 마시며 가늘게 뜬 눈으로 문쪽을 바라보며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물 마시는 나를 힐끗 보더니, 내가 이름을 부를 새도 없이 황급히 눈을 돌려 더 이상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곧장 친구 무리에게 가 보드게임을 시작했다.

.

.

나는 모니터의 밀린 메시지를 처리하며 고요히 승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그 이후로 나는 평온한 쉬는 시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명랑하고 밝은 우리 뚜진이는 그 이후로 시간은 좀 걸렸지만 선생님과 '적당하고 즐겁게' 대화하는 법을 잘 익혀 씩씩하게 2학년으로 올라갔다. 오은영 박사님이 보시면 기가 막혀하실 이 유치한 선생님을 용서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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