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체험하는 현실의 모든 것은 <기억의 재생>

호오포노포노

by 라이프루시딩

"기억의 재생"이란 말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내면치유 영성인 '호오포노포노'에서 특히 중심이 되는 개념입니다.


호오포노포노의 '기억의 재생'은 모든 문제가 잠재의식 속 과거 기억의 반복(재생)이며, 이 기억을 정화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는 개념입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고통이나 문제를 과거의 잘못된 기억들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기 때문이라고 보며, '미안해요, 사랑해요, 용서해 주세요, 고맙습니다'와 같은 문구를 통해 내면의 기억을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아주 친절한 설명이죠? 가슴이 따듯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말만 듣고 바로 가슴이 따듯해지면 안 됩니다.

바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앞서 "현실이 왜 기억의 재생인지에 대해 이성적으로 납득"해야 합니다.


납득이 안되면? 이해가 안 되면? 될 때까지 사유하고 고찰한 후에,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받아들이고, 여전히 의문이라면 계속 고찰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그럼 호오포노포노에서는 이 현실을 왜 기억의 재생이라고 부를까요?

그 이유를 한번 차근차근 짚어 봅시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객관적 현실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불러오는 기억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현상을 대할 때 "지금 이 순간의 객관적 실체"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감각, 보다 정확히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생각과 감정은 "현재의 것"이 아닙니다.


인식의 맹점 때문에 고정 불변의 현재 지점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죠.

우리가 인식하는 5감과 정신작용은 항상 "어떤 정보에 대한 해석을 감각적으로 재구성한 것"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눈앞의 물 잔을 본다 칩시다.

일반적으로 "지금 현재, 물 잔이라는 객관적 실체를 보고 있다"라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물 잔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안에서 물 잔이라는 형태로 재 구성되어 인식이 완료된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항상 "인식작용을 통해 재 구성되어 출력된 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때 최종적으로 출력된 것의 형상과 이에 대한 분별은 "이미 의식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정보에 대조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앞의 물 잔은 무언가 새로운 물 잔이 아니라 "의식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물 잔이라는 정보에 부합한다고 판단되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오감으로 경험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러합니다.


객관적 실체가 아닌 "심층의식 속 형태 정보와 일치한다고 결론 내려진 형상"을 체험하는 것이고, 이에 대한 분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을 보는 걸까요?


정보의 형태로 의식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기억"을 불러와 현실의 모습을 재 구성하여 체험하는 것입니다.


핵심 포인트는 '기억'이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재생되는 기억'이란 '개인의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억이 형성되는 경로는 단순히 '개인의 체험' 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전적으로 독립적인 '개인의 체험'이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새로운 체험'이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의식 속에 대조의 기준이 되는 정보가 없다면 감각식으로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의식 속에서 기준 정보와 대조가 일어나고 그와 유사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별이 일어나야 5감각식이 발생하는데, 처음부터 아무런 정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감각식이 구성되지 않습니다. 그저 미지의 정보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한 개인의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체험"이란 사실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입장에서 '처음 보는 것' '처음 대하는 상황'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인간의 표면의식이 심층의식의 '현실출력회로 정보창고'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호오포노포노에서 말하는 기억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 기억의 창고는 "한 개인의 경험에 대한 기억"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절대 궁극실재의 마음속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기억"이란 의미입니다.


그 방대한 이야기의 바닷속에서 "한 개인의 스토리"라는 것이 설정됩니다.

그 스토리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최우선적으로 "개인적 체험이라는 명목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말하자면 "우주적 존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범 우주적인 기억"이라 할 수 있겠군요.


'개인의 체험과 기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공간과 인과를 총 망라하는 '전체적 차원에서의 기억'이 있을 뿐입니다.


'전체로서의 기억'이 그 실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뢰야식', 세상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의 기록창고 '아카식 레코드',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 무의식' 등이 모두 이 전체적 기억을 의미하는 용어들입니다.


본래 '나'라는 것은 '개체적 자아'와 '우주적 자아' 나아가 '절대적 나'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주적 자아'의 수준만 가도 '개인적인 자아감각'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옅어져 버리죠.


그럼 개인적 자아는 왜 필요할 걸까요?


전체적, 우주적 차원에서는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의 전체만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전체적 체험을 저마다 개인의 체험으로 변환해 줄 '트랜스 포머'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전체적 체험의 기억을 개인의 체험으로 착각해 줄 '착각의 달인'이 필요합니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개체적 자아의식'입니다.


따라서 호포에서 말하는 끝없이 재생을 반복하는 기억이란 결국 "전체적 측면에서 각 개인에게 배분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 이야기들이 개인의 관념망을 이루고, 개인적 현실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현실이 어째서 '기억의 끝없는 재생'인지 이해가 가시나요 ^^


지겹게 반복되는 절망스러운 현실은 '나라는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을 탓하지 맙시다.


개인은 이야기를 출력하는 통로일 뿐입니다.

출력되는 이야기의 내용을 결정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맙시다.


당신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고른 적 자체가 없습니다.

수행을 통해 의식 수준이 높아져, 새로운 삶을 주체적으로 고르게 된다 해도,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상대, 동시, 전체성을 품고 있는 절대다"라는 자각이 그 일을 합니다.


또한 이 자각이 있어야 "내 탓입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당신은 본래 없습니다.

'절대가 품은 고유성과 다양성의 실현 통로로서의 개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개인이면서 전체"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