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우리가 키웠다”

팬덤이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지분

by 닥터 F

"니들이 키우긴 누굴 키워? 회사가 키웠지."


팬들이 "내 새끼 내가 키웠다"고 말할 때, 머글들이나 회사 관계자들은 코웃음을 친다. 그들 눈에는 우리가 그저 완성된 상품을 소비해놓고 생색내는, 자의식 과잉에 빠진 소비자처럼 보일 것이다.


회사는 주장한다. 자신들이 연습생을 발굴했고(R&D), 수억 원을 들여 트레이닝시켰고(투자), 방송에 꽂아 넣었으니(마케팅), 성공의 지분은 100% 회사에 있다고.


과연 그럴까? 그 논리대로라면, 대형 기획사에서 나온 아이돌은 무조건 다 성공해야 한다. 자본과 시스템이 완벽하니까.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3대 기획사에서 나와도 망하는 그룹이 있고, 지하 연습생 출신 중소돌이 빌보드를 씹어먹기도 한다.


이 차이를 만드는 변수가 무엇인가? 바로 '초기 팬덤의 투자'다.


이번 챕터에서는 팬덤의 활동을 경제학적 용어인 '지분(Equity)'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우리는 소비자가 아니다. 우리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비상장 주식(신인 아이돌)'을 사들여, '대장주(슈퍼스타)'로 만든 '엔젤 투자자(Angel Investor)'다.


1. 엔젤 투자자: 리스크를 감당한 건 우리였다


스타트업 업계에는 '엔젤 투자자'라는 용어가 있다. 기업이 아직 성공할지 망할지 모르는 극초기 단계에, 오직 '가능성' 하나만 믿고 돈을 대주는 투자자다. 이들은 리스크(위험)를 감수하는 대신, 나중에 기업이 성공했을 때 큰 지분을 인정받는다.


아이돌의 데뷔 초를 생각해 보자. 회사는 상품을 만들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방송국은 "누구세요?" 하며 출연을 안 시켜주고, 대중은 관심이 없다. 이때, 자신의 시간과 돈을 갈아 넣어 앨범 초동 물량을 맞춰주고, 음원 차트 진입을 시켜주고, 쇼케이스 자리를 채워준 게 누구인가?


바로 '초기 팬덤'이다. 회사는 '제작비'를 댔지만, 팬덤은 그 제작비가 회수될 수 있도록 '초기 유동성(Cash Flow)'을 공급했다. 금융 논리로 따지자면, 회사는 기술 투자를 했고 팬덤은 자본 투자를 한 셈이다.


만약 초기에 팬덤이 붙지 않았다면? 그 그룹은 '다음 앨범'을 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해체했을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그룹이 그렇게 사라진다.) 즉, 아이돌의 '생존(Survival)' 자체를 결정지은 건 회사의 기획력이 아니라 팬덤의 '구매력'이었다.


우리가 "키웠다"고 말하는 건, 젖병 물려줬다는 비유가 아니다. "부도 위기의 스타트업을 내가 살려냈다"는 재무적 팩트다.


2. 스웨트 에퀴티(Sweat Equity): 노동으로 얻은 지분


돈만 쓴 게 아니다. 우리는 '몸'을 썼다. 비즈니스에는 '스웨트 에퀴티(Sweat Equity: 땀으로 얻은 지분)'라는 개념이 있다. 돈을 투자하지 않아도, 회사의 성장에 결정적인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에게 지분을 나눠주는 것이다.


Chapter 5-1에서 증명했듯, 팬덤은 마케팅, 홍보, 번역, 위기 관리(여론 방어) 업무를 수행했다. 회사가 직원을 고용해서 했으면 수천억 원이 들었을 일을, 우리는 무임금으로 해냈다.


특히 '위기 관리'를 보자. 멤버가 억울한 루머에 휩싸였을 때, 가장 먼저 증거를 수집하고(PDF 따기), 해명 자료를 만들고, 포털 사이트 연관 검색어를 정화한 건 누구였나? 느려 터진 회사 법무팀이 아니라, 밤새워 마우스를 클릭한 팬들이었다.


기업 가치가 폭락할 위기에서 주가를 방어해낸 것. 이것은 경영진도 못 한 일이다. 이 정도 기여도라면, 일반 기업에서는 스톡옵션을 줘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니들이 한 게 뭐 있냐"고? 이건 노동 착취를 넘어선 '역사 왜곡'이다.


3. 배당금(Dividend) 요구: 돈 말고 '리스펙'을 내놔라


주식을 가진 주주는 회사에 '배당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 회사의 대주주다. 그렇다면 우리의 배당금은 무엇인가?


우리는 현금 배당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을 더 갖다 바치니까.) 우리가 원하는 배당은 딱 세 가지다.


첫째, 퀄리티(Quality) 유지. "돈 벌었으면 재투자해라." 초심 잃고 의상 대충 입히고, 뮤비 퀄리티 떨어지고, 굿즈는 로고만 박아서 비싸게 파는 짓. 이건 주주들에 대한 배신이다. 번 돈을 아티스트와 콘텐츠에 재투자해서, 우리가 덕질할 맛 나게 해주는 것. 그게 우리가 받아야 할 첫 번째 배당이다.


둘째, 아티스트 보호(Protection). "내 투자 자산을 망가뜨리지 마라." 우리가 투자한 대상은 '회사'가 아니라 '아티스트'다. 그런데 회사가 아티스트를 혹사시켜 건강을 망치거나, 멘탈 관리를 못 해 망가지게 둔다면? 이건 경영진이 주주의 자산을 훼손하는 '배임 행위'다. 아티스트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게 두 번째 배당이다.


셋째, 소통과 존중(Respect). "주주총회에서 발언권을 줘라."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멤버 추가/탈퇴, 세계관 변경 등), 최소한 팬덤의 여론을 살피고 납득시키는 과정을 거쳐라. 통보하지 말고, 설득해라. 우리는 너희의 하청업체가 아니라 파트너니까.


4. 실전 가이드: "지분을 인정하지 않으면 엑시트(Exit)하겠다"


회사가 팬덤의 지분을 인정하지 않고 "주인은 우리다"라며 독단적으로 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전략은 '투자 회수(Exit)'다.


주주가 주식을 다 팔고 떠나면 회사는 어떻게 되는가? 주가는 휴지 조각이 된다. 우리는 이 공포를 회사에 심어줘야 한다.


[협상의 기술: 주주 서한 보내기]


트럭 시위 문구나 성명서를 쓸 때, 이제 톤을 바꿔라. "오빠들 불쌍해요"가 아니라, "대주주의 경고" 톤으로 가야 한다.


"팬덤은 A 그룹의 성장에 막대한 자본과 노동을 투입한 '핵심 이해관계자(Stakeholder)'다. 회사의 일방적인 결정은 팬덤과의 신뢰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이며, 이에 우리는 지지 철회 및 불매(투자 회수)를 통해 경영진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이해관계자', '신뢰 계약', '책임'. 이 단어들은 회사가 투자 설명회(IR)에서 쓰는 언어다. 그들의 언어로 말해야 그들은 우리를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 인식한다.


5. 키운 자의 자부심을 가져라


"내가 키웠다"는 말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건 자만심이 아니다. 그동안 네가 쏟은 땀과 눈물에 대한 정당한 '자부심'이다.


네가 없었으면 그 화려한 무대 조명도 없었다. 네가 없었으면 그 트로피도, 그 빌보드 기록도 없었다. 회사는 건물을 세웠을지 몰라도, 그 건물 안에 '역사'를 채운 건 너다.


그러니 앞으로 회사가 뻔뻔하게 굴거든, 속으로 이렇게 비웃어줘라. "사장님,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월급 사장이고, 이 그룹의 오너(Owner)는 접니다."


주인은 눈치 보지 않는다. 주인은 요구하고, 감시하고, 결정한다. 이제 그 권력을 행사해라.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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