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인간, 5. 일부러 길을 잃어버린 오후

스마트폰 배터리가 꺼진 홍대 거리. 불안이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

by 닥터 F

그것은 예고된 재난이라기보다는, 아주 사소한 태만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홍대 입구 9번 출구의 인파 속에서, 나의 아이폰 화면이 깜빡거리더니 이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했다.


오후 4시 13분. 배터리 잔량 0%. 보조 배터리는 사무실 책상 위에 두고 왔고, 근처 편의점에 들러 충전기를 살까 했지만 지갑도 두고 나왔다. 내게 남은 건 '삼성 페이'가 작동하지 않는 고철 덩어리 스마트폰과, 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현금 3만 원뿐이었다 .


순간, 척추를 타고 서늘한 공포가 스쳤다. 그것은 단순히 연락이 두절된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나를 이 복잡한 도시와 연결해주던 '좌표'가 사라졌다는 실존적 공포였다. 나는 더 이상 위성 신호를 받는 파란 점(Blue Dot)이 아니었다.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연결이 끊긴(Disconnected), 미아였다.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내비게이션이 그려주는 파란 실선을 따라 걷고, 맛집 앱이 가리키는 별점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그 매끄러운 흐름에서 튕겨 나온 이물질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약속 장소인 연남동의 카페를 찾아가야 했다. 평소라면 10분이면 갈 거리였다. 하지만 지도 앱 없이는 그곳이 '동쪽'인지 '북쪽'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내 기억력의 빈약함에 절망하며, 무작정 인파가 덜한 골목으로 발을 옮겼다.


처음 10분은 금단 증상에 시달렸다. 무의식적으로 꺼진 폰을 들어 화면을 터치했고,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린 것 같은 환각(Phantom Vibration)을 느꼈다. 정보가 차단된 뇌는 불안 신호를 계속 쏘아대며 "어서 빨리 충전기를 찾아!"라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20분이 지나고, 정처 없이 골목을 헤매다 보니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불안이 서서히 가라앉고, 그 자리를 낯선 '호기심'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


스마트폰이라는 필터가 사라지자, 비로소 서울의 '해상도'가 달라 보였다. 지금껏 내가 보던 서울은 5인치 화면 속에 요약된 정보값들이었다. '평점 4.5점', '웨이팅 있음', '인스타 핫플'. 하지만 꺼진 화면 너머의 서울은 정보가 아니라 '감각'으로 다가왔다.


지도 앱에는 나오지 않는 좁고 지저분한 골목. 그곳에는 화려한 탕후루 가게 대신, 오래된 세탁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눅눅한 스팀 냄새가 있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는 허름한 백반집에서는 멸치 육수 끓이는 비린내가 났다.


나는 걷는 속도를 늦췄다. 내비게이션의 '도착 예정 시간'을 맞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길을 잃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길을 잃기로 '허락'되었다.


홍대 놀이터 뒤편, 벽화가 벗겨진 담벼락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인디 밴드 청년들의 대화가 들렸다. "야, 이번 곡은 좀 구리지 않냐?" "구리면 어때. 그냥 하는 거지."


이어폰을 끼고 걸을 땐 들리지 않았던, 도시의 소음(White Noise)이 아닌 진짜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투박하고 정리되지 않은 대화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들은 최적화된 성공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오늘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걷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서 멈춰 섰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없었기에, 나는 대신 눈으로 찍었다. 붉은 벽돌집 2층 난간에 널린 색바랜 이불, 전깃줄에 걸린 찢어진 연,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이름 모를 잡초.


'좋아요'를 받을 수 없는 풍경들. 데이터로 환산되지 않는 무가치한 장면들.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그곳에 '실재'하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보는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 큐레이션 되고 편집된 '증강 현실(AR)'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터리가 꺼진 뒤에야 비로소 나는 서울의 '민낯'을 보았다. 화장을 지운, 주름지고 거칠지만 따뜻한 체온이 있는 진짜 얼굴을 .


한 시간쯤 헤맸을까. 우연히 들어선 골목 끝에서 나는 약속 장소인 카페 간판을 발견했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최단 경로(10분)보다 50분을 더 돌아서 온 셈이었다. 지독하게 비효율적인 동선이었다.


하지만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나의 기분은 묘하게 상쾌했다. 나는 단순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도시를 '탐험'했다. 알고리즘의 가이드 없이, 내 두 다리와 직관만으로 길을 찾아냈다는 원초적인 성취감.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왜 이제 와? 카톡은 왜 안 봐?"


나는 꺼진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툭 던져 놓으며 웃었다. "배터리가 나갔어. 덕분에 서울 구경 좀 제대로 했지."


검은 화면 속에 비친 내 얼굴은 더 이상 데이터 덩어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잃은 덕분에, 나는 비로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오차 범위 밖의 서울에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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