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이룬 일

미리 하는 연말정산

by 헤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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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바꾸려는 시도는 이상하게도 성공했다. 자살충동이 샤워를 한 듯 씻겨 내려갔다. 지금은 누군가 나를 죽이러 온다면 오냐 하고 즐거이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내가 나서서 먼저 죽고 싶지는 않은 정도다. 이제 문제는 그 다음 스텝이다. 자살충동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길을 걷다가도, 게임을 하다가도, 자기 전에도 엉엉 우는 내가 남아 있었다. 불시에 울컥하는 감정과 함께 눈물이 주룩주룩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정신병원에 가서 물어보니, 그동안 못 느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것일 수 있단다. 그러니 약 조정을 조금 해보자고 하셨다.

상담에 가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우는 이유는 사실 두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2025년을 헛되이 보냈다는 생각과, 곧 끝날 상담 관계가 바로 그것이었다. 상담 관계는 치료적인 관점에서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라는 말로 위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2025년 한 해가 정신병으로 점철된 것 같다는 공허함은 아무리 좋은 말들을 퍼나르고 퍼날라도 채워지지 않았다. 3월에 상담을 시작해서 4월에 병을 발견하고, 5월 자살시도를 해 6월 입원하고, 다시 7, 8월에 입원을 한 다음 9월엔 휴학을 해서, 10, 11월에 또 다시 자살시도를 했던 게 내 한 해라니.

그래서 오늘 상담에서는 내가 2025년에 이룬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작업을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 했다. 우선 최악의 상황에서도 썩 괜찮은 성적으로 한 학기를 마무리한 것. 정신병원에 들어가서는 다양한 삶들을 보며 모든 인생이 가치로움을, 그러니 부질 없어 보이는 내 삶도 예쁜 구석이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쉬는 법도 제대로 모르던 내가, 온전히 나를 위해 휴학이라는 쉼을 택했다. 최근 자살사고를 스스로 정리해보았고, 무엇보다 상담 관계를 한 해 동안 계속 이어오고 있다. 가서 내가 하는 일은 없지만(왜 없냐는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누군가와 관계를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해보는 경험은 나에게 깊은 의미를 남겼다. 상담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쓰고 싶다.

2025년 이룬 일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공허함이라는 바닥이 뚫린 그릇에만 물을 붓고 있었는지. 아무래도 우울이 너무 커서 시야를 다 가려버리기 때문인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심지어, 이룬 일이 하나도 없더라도 반 학기 정도 쉬었다 생각하면 어떠냐고 하셨다. 그래,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인생도 단지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한다. 알면서도 내 인생에는 적용이 잘 안 되는 모순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살아보려 오늘도 노력한다. 왠지 아직 12월이 지나지 않았지만, 2025년을 마냥 슬픈 감정으로 보내주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