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릴적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내가 어릴 땐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주말 밤마다 한국어 더빙이 들어간 외국 영화를 공중파에서 틀어주곤 했다. 그 때는 인터넷이나 VOD 서비스가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었고, 내가 살던 동네에는 극장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케이블 TV를 아주 늦게 설치해서 당시엔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가 아니면 영화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렇게 주말마다 이름도 생소한 영어 제목의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서서히 좋아졌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들을 볼 수도 있었고, 상상만 하던 세계를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너무나 생생하게 펼쳐있었다. 연기하는 배우들이 마치 실제 그 사람인양 악역 주인공을 한없이 미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러 가리지 않고 찾아보던 영화였지만 인생의 여러가지 우선순위에 밀리고, 요즘은 아주 편식쟁이가 되어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장르, 스토리. 그저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찾아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비슷한 스토리에, 비싸진 영화표 값, 언제 어디서든 영화를 볼 수 있는 OTT와 VOD 서비스. 그렇다보니 이제 영화는 내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2시간에 이르는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고 낭비하고 싶지 않아 꼭 내 입맛에 맞는 것, 안정적으로 확실하게 나의 만족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만 찾게 되었다.
그렇게 깐깐한 편식쟁이인 나에게 확실한 만족감을 주었던 영화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주인공 애쉬튼 커쳐는 일기장을 읽으면 그 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자 어릴 적에 쓴 일기를 읽으며, 과거로 돌아가고 과거의 사건을 하나씩 바꾸기 시작하는데, 바꾸면 바꿀수록 자신의 현재의 모습도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현실에선 불가능한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에 정말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이 영화를 보고 나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한 게 한 두번이 아니다. 나 역시 이 주인공처럼 꼭 바꾸고 싶은 불행한 과거가 있었기에 수십 번을 보았던 영화다.
'안본 눈 삽니다, 안본 뇌 삽니다' 가능하다면, 이 영화를 안본 눈과 뇌를 꼭 사고 싶다. 다시봐도 재밌는 아니 볼수록 재밌는 아는만큼 재밌는 영화니까. 아직도 이 영화를 봤던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재수를 했을 때 였는데 친구와 주말에 재수학원을 마치고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보았다. 개봉 첫 주쯤이었는데 이미 호화출연진으로 큰 기대가 있던 영화라 자리가 앞자리 밖에 안남아 있었음에도 우린 이 때 아니면 못본다는 마음으로 덜컥 예매를 했다.
이 영화는 간략한 줄거리 설명조차 어려우니 생략하기로 한다. 내 감상을 요약하자면 명배우들의 연기와 다채로운 비주얼 그래픽, 탄탄한 스토리라인 삼박자를 고루 갖춘 영화라고나 할까. 보고 나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감독 천재다'라는 감탄이 쏟아졌다.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인터넷을 찾아보며 나름의 공부(?)를 했고, 시간이 흘러서도 찾아보고 다시보고 그 감동과 감탄을 되새기곤 했다. 아마도 재수라는 험난하고 고달픈 시기를 겪고 있던 당시의 나는 어쩌면 내 일상이 너무 갑갑해 인셉션에서 그리는 '림보' 속이라고 믿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가면 진짜 내 인생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지금의 나는 꼭 진짜 내가 아닌 것처럼 도피하고 싶어서 그래서 더욱 이 영화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 역시 너무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다. 난 개봉 당시에 보지는 못했고, 이 영화 역시 재수 시절 학원 친구의 추천으로 감상하게 되었다. 아픈 사랑의 기억을 지워준다는 업체를 통해 주인공 짐 캐리는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을 잊으려 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소재가 너무 독특하고 마치 진짜 있을법한 것이라 한층 더 공감이 되기도 한다.
한 때 자주 쓰는 말 중에 '기억 조작 영화', '기억 조작 노래'라는 표현이 있는데 딱 이 영화가 그거다. 분명 이렇게 절절한 사랑따윈 해본 적이 없는데 이 영화 한 편을 보고나면 마치 내가 이렇게 절절하고 아리따운 사랑 후에 끙끙 앓고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만드는 기억 조작 영화다. 영화 속에 여러 단서와 복선을 돌아보며 다시 봐도 재밌고 먹먹한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영어 원제목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라는 제목에 감탄하며 한번 더 깊은 여운을 느낄 수 있다.
갓 학생 티를 벗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다. 주인공 심은경이 서울로 상경해 여고 친구들과 '써니'라는 이름의 모임을 결성하고 일어나는 일들을 담고 있다. 이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엄마'라는 키워드다. 난 '엄마'도 나와 같은 청춘이라는 시간이 있었다는 사람인 걸 자주 잊는다. '엄마는 그냥 엄마잖아!'라는 생각 뿐이었다. 심은경과 유호정을 오가는 임나미의 인생을 보니 너무 현실적이다 못해 가슴이 아파서 엉엉 울었다.
찬란히 빛나던 주연으로 살아가던 인생에서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과 가정을 위해 조연으로 살아가는 엄마라고 해야 할까. 아니 엄마의 인생에선 엄마가 주연이지만, 자식들은 그걸 잘 알지 못한다. 당시의 시대 배경도 잘 담고 있고, 시대를 초월하고 여고생들은 다 똑같다는 학창시절에 대한 그리움, 엄마에게도 찬란히 빛나던 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더 빛날 수 있는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 등 여러가지 메시지와 생각을 동시에 떠올리게 했던 영화였다.
주인공이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기며, 보이밴드를 결성하고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영화다. 음악 영화는 되도록 극장에서 봐야한다는 의식을 심어 준 영화이기도 하다. 간단히 내 감상을 말해보자면 '팔딱팔딱 뛰는 청춘의 무모하지만 뜨거운 도전'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후반부에 가면 이 영화의 핵심 주제를 담은 주제곡 <훔친듯이 달려(Drive It Like You Stole It)>가 나오는데 신이나고 경쾌하면서도, 진짜 이렇게나 무모해도 될까 싶은 못말리는 청춘들의 가사와 흥겨운 장면들이 겹쳐나오면서 '내가 저렇게 자유로웠던 때가 언제였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무모해지면 안되는 나이. 새로운 걸 도전하기 보다는 안정을 찾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저들이 가진 에너지와 무한한 가능성이 부럽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나만 생각하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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