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주목해야 할 것들을 강렬하게 말하기
지난 11월, 경기도극단 <맥베스>의 막이 올라갔다. 연출은 그간 다양한 작품에서 시각적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그려왔던 한태숙이다. <맥베스> 연출로서 그는 무엇을 특히 조명하고자 했을까? 첫 번째는 욕망에 잠식된 인간의 모습으로, 맥베스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두 번째는 맥베스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탐욕 때문에 희생당한 자와 그를 잃고 애도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연극은 막이 오르고 내릴 때까지 죽음에 주목한다. 죽음은 관으로써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더라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할수록 죽음의 덫에서 더욱 벗어나기 어려움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무대 위에 수없이 놓인 관을 통해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에 주목하게 했다.
연출은 개인의 욕망과 그 개인의 욕망으로 희생당한 사람, 그리고 소중한 자를 잃은 사람을 강렬하면서도 충격적인 이미지와 맞물며 비추고자 했다. 그러한 연출을 통해 한태숙은 <맥베스>에서 새롭게 주목해야 할 점들을 강렬하게 관객에게 제시했다.
욕망에 기꺼이 잠식당하길 자청한 맥베스
연극은 현대식 군복을 입은 맥베스의 모습을 조명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첫 장면은 일반 관객이 흔히 알고 있는 고전적인 <맥베스>가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어느 현대사회를 배경 삼은 작품을 상연하는 게 아닌지 착각하게 한다. 다만 연출은 원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하고자 총성이 오가는 전쟁터를 배경 삼지 않았다.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기에 등장인물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시달리고 있음을 부각하기 위해 전쟁터를 배경으로 적극적으로 빌려왔다.
한태숙 연출이 그린 맥베스는 그동안 다양한 창작물에서 그려진 맥베스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다른 유형의 인물로까지 보인다. 왜냐하면 한태숙 연출의 맥베스는 ‘우유부단하며 쉽게 휩쓸리는’ 맥베스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가령 세 마녀의 예언을 들었을 때 맥베스는 마치 숨겨온 자신의 욕망이 깨어날 수 있는 적절한 때를 기다려온 사람과 같아 보였다. 이때의 맥베스는 세 마녀의 예언이 아니더라도 다른 동기가 있었다면 언제고 스스로 욕망을 깨웠을 것이다.
한편 맥베스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이디 맥베스라는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기존 창작물에서는 우유부단한 맥베스를 휘두르는 능동적인 악인으로서 레이디 맥베스를 그렸다면, 연극은 여기서 더 나아가 던컨 시해를 기점으로 스스로 욕망에 잠식당하길 택한 맥베스와 살인을 실제로 저지르고 패닉에 빠져버린 레이디 맥베스를 대조적으로 보여줬다. 던컨 시해 이전에는 맥베스가 피동적 인물로, 레이디 맥베스가 능동적 인물로 그려지는 듯했다면, 이후에는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처럼 레이디 맥베스를 그려냄으로써 맥베스의 새로운 모습을 부각했다.
물론 맥베스도 레이디 맥베스처럼 살인을 저지른 이후 심리적으로 불안해한다. 그러나 그 불안감은 레이디 맥베스의 불안감과는 다르다.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다. 이러한 불안감을 느낀 순간 자신이 무슨 길을 걸어왔는지 되돌아볼 기회가 맥베스에게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정적을 죽일수록, 권력을 탐할수록 자기 내면이 추악하게 뒤틀릴 것임을 매우 잘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 점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기꺼이 들어섰다. 한 번 움켜쥔 권력을 차마 놓기 싫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권력을 쥐는 것은 눈 뜨고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가고 싶었다. 결국 맥베스는 레이디 맥베스까지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될 것 같이 보이자 망설임 없이 죽인다.
레이디 맥베스와 맥베스 모두 욕망이 있었다. 다만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와 달리 내가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타인 또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욕망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던컨을 시해하자고 맥베스를 부추길 때 레이디 맥베스는 관을 왕좌와 같이 쓰다듬었는데, 그 관은 나중에 레이디 맥베스가 손에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며 울부짖을 때 바로 옆에 있었다. 대조되는 두 상황에 공통으로 놓인 관을 통해 레이디 맥베스가 뒤늦게 무엇을 느꼈는지 드러냈다.
세 마녀의 예언을 듣고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깨운 맥베스는 다시 그들을 찾아간다. 그는 마녀가 준 정체 모를 풀을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씹었다. 폭식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이내 씹어 먹은 풀을 토했지만 마치 독약을 들이켠 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때는 늦었다. 맥베스가 씹은 풀이 관 위에 난 것임을 상기해본다면 그가 죽음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맥베스가 움켜쥔 권력은 목숨과 맞바꾼 권력인 셈이다.
맥베스는 문득 추악한 모습의 자아를 발견한다. 피를 뒤집어쓴 자아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공포심에 온몸이 마비되었지만, 그다음에는 공포심을 느끼기는커녕 대적했다. 맥베스의 자아는 영원히 젊은 도리언 그레이 대신 추하게 늙어가는 그의 초상화를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권력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맥베스 그 자신은 괴물과 같아 보이는 자아보다 더 추악함을 모를 것이다.
권력에 끊임없이 집착했던 맥베스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죽음은 정적만이 아니라 세상이 원했던 죽음이었다. 마지막 전투가 시작될 무렵 여러 사람이 등장하여 관을 세웠는데, 그 순간만큼 관은 관이 아니라 “맥베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자 세상이었다. 세상의 바람대로 맥베스는 결국 처절한 최후를 맞이했다. 권력의 쟁점에 서기 위해 맥베스는 정적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피로 물들여진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지만, 그 자신도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에게 살해당했다. 올라가기까지는 힘겨운 계단이지만 한순간 추락하기에는 허무할 정도로 쉬운 계단이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정확하게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맥베스는 살아 있었다면 하지 않았을 말을 한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욕망에 잠식당했음을,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끝까지 욕망에 집어삼켜지길 자처했음을 깨달았다. 죽음을 두려워했던 그였지만 죽음을 통해 비로소 욕망에 집착하는 것을 멈추고 잠,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욕망에 집어삼켜진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사라진 사람들
만일 맥베스가 세 마녀의 예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비참한 최후를 피할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맥베스와 다르게 예언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맥베스는 예언이 아니라 자기 욕망에 의해 몰락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예언은 단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그렇다면 그 외에는 자기 안에 꿈틀거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웠을까? 그렇지 않다. 던컨, 밴코우, 맬컴 등도 맥베스와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얼마나 욕망에 자기 몸을 내던졌는지 정도의 차이이다. 연출은 이 점에 주목하여 맥베스가 사망한 이후 평화가 되찾아왔다고 막을 내리기보다는 비정한 살인이 끊이지 않는 현장을 무대 위에 펼친다. 그 현장은 권력 찬탈이라는 욕망이 얼마나 사람을 비정하게 만드는지 보여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욕망에 휘둘린 사람들의 최후를 냉정하게 보여줌으로써 욕망 끝에 허무함이 남았음을 강조했다.
연극은 폐허 위에 허무함만 남았음을 보여주며 막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의외의 장면 하나를 추가했다. 그 장면은 욕망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주목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 한 사람들의 모습, 바로 타인의 욕망 때문에 희생당한 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며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 속에 밴코우의 아들 플리언스가 있었다. 그는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권력을 차지했다는 기쁨보다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휩싸였다. 연출은 소중한 이를 상실한 슬픔에 휩싸인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마지막에 조명함으로써 탐욕에 물든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묵직하게 말했다.
한태숙 연출은 <맥베스>를 단순히 동시대적으로 읽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해야 할 것들을 부각함으로써 지금 이 시대에 왜 <맥베스>를 올렸는지 설득적으로 말했다. 그러한 한태숙의 설득적 말하기는 시각적 충격과 맞물려 인상적인 드라마로 <맥베스>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