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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막 일장 Sep 08. 2023

연극 <생활의 비용>

타인이 느끼는 삶의 버거움을 덜어줄 수 있을까?

연극 <생활의 비용> 포스터

제목이 왜 ‘생활’의 ‘비용’인지 궁금해졌다. ‘삶’, ‘생계’ 등 다른 단어도 있는데 왜 ‘생활’이어야 했을까? 또 ‘비용’은 문자 그대로 금전과 연관된 거 같지 않다. ‘생활’은 ‘생존’으로, ‘비용’은 ‘품’으로 다가왔다. 특히 후자의 경우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을수록 상대적으로 더 들여야 하는 시간, 에너지란 점에서 ‘비용’이 아니라 ‘품’이란 단어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품’에는 감정 소모도 포함된다. 이는 제스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연극은 제스-존/에드-안나 두 관계를 돌아가며 보여준다. 에드와 안나는 과거에 부부였다 현재는 별거 중이다. 이들은 그나마 동등한 위치에 놓였다. 반면 제스와 존은 피고용인과 고용인으로 만났다. 이는 평등한 관계로 시작하지 못했음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서로 대화가 오가도 한쪽은 진정한 소통이 왜 부재하나 고민하게 한다면 한쪽은 위계질서와 감정 노동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긴장의 종류나 정도도 다르다.

제스와 존의 동등하지 못한 관계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존은 자신의 약자성을 내세우며 무조건적인 이해와 공감을 강요한다. 고용자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최악이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평가하는 건 원치 않으면서 자신은 타인을 쉽게 평가하고 그의 모든 것을 집요하리만치 캐내려고 한다. 처음에는 타인과의 소통이 적은 나머지 소통 자체에 익숙지 않아 타인을 향한 관심과 궁금함이 무례함으로 비치는 거라 선해하려 했다. 그러나 끝까지 다 보고 나니 그는 그저 자신을 무조건 이해하길 강요하는 이기적인 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제스에게 대화하고 싶다 했지만 사실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던 거였다. 정말 대화가 하고 싶었다면 제스가 어떤 주제에 대해 왜 말하길 꺼리는지 살펴봐야 했다. 그러나 그는 대화에 서툴러서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그 부분은 무시했다. 그걸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존은 제스와 ‘제대로’ 대화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건 에드와 안나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불통이었다. 분명 대화라는 걸 하고 있는데 대화라고 할 수 없었다. 제대로 듣고 있어? 제대로 받아들였어? 객석에 앉아있었지만 안나와 같이 에드에게 묻고 싶었다. 에드는 얼핏 보면 안나를 위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음악을 틀지 말아 달라는 작은 부탁까지 무시해 버린다. 대단한 악의를 품고 무시한 게 아님을 안다. 하지만 일방적인 소통만 하고 있었다. 자기가 좋을 대로 받아들이고 생각하며.

그렇게 에드가 변함없었다면 계속 자기 멋대로 구는 인간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10월의 에드는 9월의 에드와 달랐다. 물론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과거와 비교한다면 더 나은 사람으로 변했다.

안나는 에드에게 말한다. 만일 자신이 사고당하지 않았다면, 혹은 에드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자신을 찾을 리 없었을 거라고. 그런 안나에게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에드는 안나 혹은 자신이 어떻건 언젠가 찾아왔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는 별거 후에도 안나를 잊지 못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안나도 회의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마음 한편엔 에드에게 의지하고 싶었기에 에드의 번호를 비상 연락처로 저장한 게 아닐까? 정말 그를 경멸했다면 그렇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일 안나가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다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에드가 안나의 말을 그나마 들을 태도를 갖췄을 때 안나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한없이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제스와 에드는 서로 다른 곳에 살아왔기에 연결 지점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추운 겨울, 뜻밖의 순간에 만난다. 두 사람은 다른 곳에서 다르게 살아왔지만 각자의 사연 때문에 내가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소통을 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제스는 엄마에게 서러워하며 전화했고, 에드는 안나가 없는 집 안 공기가 유난히 얼어붙었음을 느낀 게 아닐까?

대가 없이 사람이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 타인의 존재로 느껴지는 온기를 그리워했다고 해도 금세 가까워질 수 없다. 특히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스는 존에게 환멸감과 불신감을 느꼈기에 선의를 베풀고 싶어 하는 에드를 경계 한다. 에드는 그런 제스를 이해 못 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다 마지막에 제스는 미약하게나마 에드를 신뢰한다는 듯 차로 돌아가 오래된 커피를 들고 에드를 다시 찾아간다. 두 사람은 서로 오래된 커피와 식은 피자를 교환한다. 그렇게 연극의 막은 내린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드는 비용은 생각보다 막대하다. 비용의 의미를 넓게 잡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삶이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삶이 괴로움과 버거움으로만 점철되지 않은 것은 대가 없는 인류애, 상대가 상대에게 향한 투박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그런 마음이 존재하고 그 마음으로 누군가를 살아가게 한다면 세상은 아주 각박하지만 않을 것이다.

배우들이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처럼 실감나게 연기를 잘해서 더욱 극이 사실적으로 와닿았다. 특히 김용준 배우의 연기는 생활 그 자체였다. 


*제스-존/에드-안나 두 관계에서 한 사람은 신체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그렇게 인물을 설정한 이유는 무얼까? 그러고 보니 무엇을 기준에 놓느냐에 따라 인물마다 무게 중심의 위치가 다르게 느껴질 거 같다. 특히 개인적인 콤플렉스와 연관하여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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